1945년 8월 6일 새벽. 미국 509비행대 폴 티베트대령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딴 폭격기 ‘에놀라 게이’호를 몰고 태평양의 티니안섬을 출발했다. 5시간여 비행 끝에 히로시마 상공에 도달했을 때 하늘은 맑게 개어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간이 인간에게 투하한 최초의 원자폭탄이 그 아침 히로시마를 강타했다. 오렌지빛 섬광과 엄청난 불덩이가 치솟았고 시속 9백㎞의 폭풍이 뒤를 이었다. 반경 4㎞안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3일 후 이번엔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두 도시에 투하된 ‘리틀 보이’와 ‘패트 맨’은 5년 이내에 27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1940년대초 핵분열은 원자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실험방법에 불과했다. 이것이 수없이 많은 우연한 사건,인물들과 교차하면서 가공할 폭탄 제조로 발전했다.
1938년 이탈리아 과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스웨덴으로 노벨상을 받으러 갔다가 그 길로 미국에 망명했다. 그의 아내는 유태인이었고 이탈리아 뭇솔리니 정권은 반유태인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미는 그후 시카고대에서 핵연쇄반응실험에 성공했고 최초의 원자로 설계로 원자폭탄제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38년말 독일에서 오토 한 등이 핵분열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에 망명한 과학자들은 독일이 엄청난 신병기를 갖게 될까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헝가리출신의 레오 지러드는 39년 여름 휴가중이던 아인슈타인을 찾아갔다. 아인슈타인은 처음에 핵분열에서 신무기가 개발될 수 있다는 가설을 부정했다. 그러나 후배들의 설득에 마지못해 미국 정부에 경각심을 주자는 생각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핵분열로 놀라운 에너지가 나올 수 있으며 독일에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이 원자탄개발에 실패할 줄 알았더라면 편지를 쓰지 않았을 텐데…”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한달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지만 않았어도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대통령의 서류함속에 묻히고 원자폭탄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41년 12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는 이미 작은 톱니들이 모여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원자폭탄제조계획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가 본격화된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12만 5천여명의 과학기술자들과 20억달러의 재원을 동원한 거창한 계획이었다. 4년뒤인 45년 7월 뉴멕시코주 로스앨라모스의 비밀연구소 근처에서 첫 원자폭탄실험이 성공했다.
독일은 항복한 뒤였다.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경우 50만∼100만명의 미군이 희생당하리라고 추산한 미군부는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속히 종결시키자”고 주장했다.
반면 제임스 프랑크를 위원장으로 하는 과학자위원회는 원폭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투하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로스앨라모스연구소장인 오펜하이머등 4명의 과학자가 포함된 ‘잠정위원회’는 ‘전쟁종식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직접 투하를 권고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폭탄의 위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일까.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는 몇가지 우연들이 더 있었다.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가 미국 본토에서 원폭의 일부를 싣고 태평양의 티니안섬에 내려놓은 것은 45년 7월 26일. 이 배는 돌아가다가 3일후 일본 잠수함에 의해 격침됐다. 사고가 3일전에만 일어났어도 원폭은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있었다. 로스앨라모스에서 티니안섬까지 원폭자재를 운반하던 B29기 한대가 공중 고장을 일으켜 거의 추락할 뻔했다. B29기가 간신히 추락을 면함으로써 2개의 원폭 자재가 모아졌다. 그때는 미국 전체에서 긁어모아도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20세기에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원자폭탄이 개발돼 두번 쓰였다. 현재 전세계의 원폭은 3만여개. 히로시마를 지워버린 폭탄의 60만배에 달하는 파괴력이다. 그중 일부만 폭발해도 지구에선 아무도 살 수 없다.
21세기 인간의 ‘의지’가 또다시 어떤 미묘한 ‘우연’들의 일치로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로스앨라모스〓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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