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中美)의 최빈국 온두라스에서 봉사활동을 펼쳐온 권혜영(權惠英·30)씨에게 따라붙는 말이다. 결혼도 잊은 채 96년초부터 3년반동안 온두라스 빈민들에게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외동딸로 금지옥엽(金枝玉葉) 자라난 권씨가 국제봉사활동에 나서게 된 데는 94년 르완다사태가 계기가 됐다.
92년 중앙대 간호학과 졸업후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하던 권씨는 어느날 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르완다여인이 굶어죽은 어린 아이를 안고 망연자실해 있는 모습, 그 여인의 옆에는 아사자(餓死者)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때 권씨는 큰 충격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열정을 가눌 수 없었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학시절 깊이 고민하던 물음이 되살아났다.
권씨는 병원으로부터 휴직을 허락받아 그해 10월부터 두달간 르완다에서 국제구호단체 단원들과 함께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봉사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은 권씨는 이듬해 5월 병원 일을 그만둔 뒤 빈민국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는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KFHI)를 찾았다.
두차례의 봉사훈련과정을 거쳐 온두라스 땅을 밟은 것은 96년초. 현지 선교단체와 함께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속에서 온두라스에서도 가장 가난한 남부 시골지역을 돌며 의료봉사활동과 위생교육사업에 나섰다.
먼저 시작한 일은 지역주민들에게 기초적인 의료활동을 할 수 있는 ‘건강리더’를 양성하고 의료시설이 없는 시골지역엔 항생제 등 상비약을 비치하는 ‘미니약국’을 만드는 것.
또 주민들과 함께 농토를 개간, 콩을 심게 하고 염소를 사육해 염소 젖을 짜게 했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권씨의 도움으로 영양실조로 팔다리가 앙상한 채 배만 부르던 아이들이 튼실하게 자라날 때 권씨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주민들의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질 때 권씨의 마음도 덩달아 밝아졌다. ‘이게 바로 삶이구나.’그는 삶의 해답을 찾았다.
그러나 보람도 잠시, 온두라스에 새로운 시련이 닥쳤다. 지난해 10월 일주일동안 불어닥친 허리케인 때문에 농작물의 70%가 유실되는 등 온두라스 전역이 전쟁직후처럼 초토화됐다. 3만여명의 사상자와 전인구의 10%가 넘는 60만명의 이재민도 발생했다.
권씨의 몸과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현지 의료인과 이동의료봉사단을 꾸려 전국을 돌며 하루 평균 400여명의 환자를 돌보고 국제구호단체들과 연결해 주민들에게 물자와 식량을 공급했다. 온두라스 주민들에게 그는 그야말로 ‘희망의 전령’이었다.
권씨는 봉사활동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지난달 말 귀국, 3개월 예정으로 머무르고 있다.
“내가 베푼 것보다 온두라스 주민들로부터 내가 받은 게 더 많다”고 겸손해하는 권씨는 “하루 빨리 후원금을 모아 나를 필요로 하는 온두라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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