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터키군보다 용맹했던 軍은 없다

  • 입력 1999년 8월 29일 18시 45분


“인류의 자유를 위한 신성한 길에서 싸우다 남편은 영광스럽게 전사했고 전우들과 함께 편히 잠들 것입니다.”

52년 6월 6일 터키군 합참의장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터키군 제2여단 부여단장 누리 파밀대령의 미망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파밀대령은 강원 양구군의 최전방 초소에서 전사했고 현재 부산 유엔군묘지에 부하 장병 461명과 함께 잠들어 있다.

3차에 걸쳐 파병된 터키군 장병 1만4936명은 4번에 걸친 대규모 접전을 포함해 수없는 격전을 치렀다.

최초의 대규모 전투는 50년 11월 평안남도 개천시 군우리에서 벌어졌다. 터키군 제1여단은 새벽부터 이튿날 오전 11시까지 중공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약 두달 후인 51년 1월 제1여단이 한강진출 작전의 우측 선봉을 맡으면서 설욕의 기회를 맞았다.

터키군은 경기 용인시 기흥읍 신갈리 남쪽의 151고지와 김양장리 탈환작전에 나섰다.이 전투에서 터키군의 용맹성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무차별 포격을 퍼붓는 중공군을 격퇴한 것. 중공군 전사자는 무려 474명.

같은해 4월 22일 경기 연천군과 철원군에 걸쳐 있는 장승천 일대에서 벌어진 세번째 접전에서 터키군은 66명 전사 105명 실종 35명 부상이라는 손실을 입었다.그러나 전사가(戰史家)들은 이 전투에서 터키군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지 않았다면 아군 부대들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네번째 접전의 주역은 52년 8월 한국에 파병된 터키군 제3여단.

‘네바다 접전’으로 불린 이 전투는 53년 5월 평안남도 개성시 인근 고랑포에서 벌어졌다. 당시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평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전선 곳곳에서 이어졌다.

이틀동안 7차례나 진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에서 터키군은 중공군 사상자 3000여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터키군은 이밖에도 한반도 곳곳에서 접전을 벌여 89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 2147명이 부상했으며 229명이 포로가 됐다.

〈이헌진기자〉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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