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정상화 협상을 촉구한 쪽은 김용순이었다. 캔터는 북한측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의무조항 서명을 요구하면서도 반대급부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었다. 캔터는 ‘관계정상화’를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회담은 1회에 그쳐야 하며 대북관계정상화 가능성을 시사해서는 안된다는 한국정부의 사전요구 때문이었다.
▼美 국교정상화 먼저 제의▼
회담후 공동성명을 발표하자는 북한측 제안도 미국이 거부했다. 그래도 북한은 9일 뒤인 30일 안전조치의무조항에 서명했고 김용순은 캔터에게추가회담을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미국은 묵살했다. 북한은 그렇게 대미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다.
그후 7년8개월여가 흐른 12일 베를린 북―미회담에서는 상황이 역전됐다. 미국이 국교정상화를 제의했다.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지렛대로 협상의 지위를 뒤바꿔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같은 반전에는 무엇보다 한국정부의 태도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노태우(盧泰愚)정부의 선(先)남북관계개선―후(後)북―미관계개선 원칙이 김영삼(金泳三)정부에서는 북―미관계개선과 남북관계개선의 조화와 병행으로 바뀌었다.
▼DJ 北美관계 先行 용인▼
그리고 김대중(金大中)정부는 북―미관계개선의 선행(先行)을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대통령은 지난해 6월 미국의 무조건적 대북제재 완화와 미국 일본 등 서방의 대북관계개선을 촉구해 정책변화를 극명하게 내보였다.
따라서 베를린합의와 페리보고서는 김대통령의 그런 제의와 대북포용정책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페리보고서는 미국의 대북정책목표를 담은 것이지 남북관계와 직접적 관련은 없다.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17일 기자회견에서 “북―미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남북대화는 필수적 요소”라고 말했으나 강조점은 “북―미수교협상이 남북대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우리는 한국정부와 함께 믿는다”는 말에 있었다. 북―미수교협상에 남북대화 진전이 조건으로 따라붙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南北문제 의제제외 시사▼
미 국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최근 기자와 만나 “남북문제는 남북한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향후 북―미협상 의제에서 남북문제가 제외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대신한 대북협상창구로 단일화되지는 않는다는 뜻도 된다. 한미일이 3국 조정감독그룹(TCOG)을 통해 긴밀히 협의해도 대북관계에서는 각개약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국정부와 페리의 대북시각도 다르다. 한국정부는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보지만 페리는 그 가능성을 낮게 파악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로 대미관계개선에 치중하면서 한국에는 대결자세를 버리지 않을 경우. 특히 북―미관계가 앞서 나가 남북관계와 간격이 벌어지는 데 대해 한국내에서 반대여론이 조성되면 한국정부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아 남북관계 개선 없이 북―미수교가 이뤄진다고 해도 한반도의 세력균형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이 러시아 중국과 수교한 마당에 고립되고 약화된 북한이 미국 일본과 수교한다고 해서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