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名古屋) 출신의 모리타는 46년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와 도쿄통신공업(58년 소니로 개명)을 설립해 영업과 재정을 총괄하면서 소니를 세계적 업체로 키웠다.
71년 사장, 76년 회장에 취임한 모리타는 미국 CBS방송과 제휴해 음악분야에 진출하는 등 사업다각화에 힘썼다.
89년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해 “미국의 혼(魂)까지 사는가”라는 미국측의 비판을 받자 그는 “혼을 파는 측에는 문제가 없는가”라고 반박해 화제가 됐다.
같은해 현 도쿄도지사인 보수논객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와 함께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공저, “미국은 10분 앞밖에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니가 개발한 세계 최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컬러TV 워크맨 등 신제품의 미국시장진출을 위해 한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시장개척을 직접 지휘했다.
일본 주요 기업인 중 가장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 모리타는 헨리 키신저 전미국무장관 등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미일 무역마찰 때마다 막후조정을 했다.
86∼92년 경제단체연합회 부회장 때는 ‘일본재계의 외상’으로 불렸다. 9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94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요양해왔다.
소니 설립취지서에 그가 넣은 ‘기술의 힘으로 조국부흥에 이바지한다’는 대목은 지금도 ‘소니의 정신’으로 불린다. 66년에는 ‘학력무용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도쿄〓권순활특파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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