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관협력 전통이 강한 일본은 경제단체의 주장을 정부가 받아들여 총리 주도의 ‘산업경쟁력회의’를 가동시켰고 미국 영국 등도 자국 업계의 주장을 행정부 책임자가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는 장치를 두고 있다.
재계 전문가들은 “지난해 가동한 정재계 간담회를 복원시키거나 더욱 확대해 외환위기를 넘어선 이후의 산업경쟁력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빅딜 압박용’으로 끝난 정재계간담회〓지난해 7월2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정재계 마라톤회의에 참석했던 한 5대그룹 회장은 “정부관료와 국가의 미래를 놓고 이렇게 진지하게 논의해보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난상토론이 벌어졌던 이날 회의에서 5대그룹은 자율빅딜(사업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자제에 합의했다.
★공식 의사통로 단절
그러나 2,3차례 후속 회담을 진행하면서 간담회는 재계의 빅딜 약속을 정부가 채근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정부 재계 금융기관 대표들이 구조조정 협약을 한 뒤엔 간담회가 일종의‘개혁약정 서약행사’로 완전 변질됐다.
정부일각과 민간경제연구소에서 ‘한국은 21세기에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우려가 팽배하지만 정부와의 공식적인 의사통로는 단절된 셈이다.
▽선진국의 민관협력 모델〓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금융권의 부실이 커진 일본경제는 ‘소리없는’ 구조조정을 진행중이다. 경단련(經團聯)은 지난해 12월15일 대정부 제언을 통해 “에너지 물류 조세 사회간접자본 노동 등 5개 분야에서 고비용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산업경쟁력전략회의(가칭)’를 설치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군말없이 이 제안을 수용했다.
방위청장관을 제외한 17명의 각료와 이마이 다카시(今井敬)경단련회장 등 17명의 기업인대표가 여기에 참가했다. 오부치 총리는 직접 회의를 주재한다. 올해 9월6일까지 7차례 간담회를 열면서 일본 정부는 재계의 의견을 토대로 산업활력재생특별조치법(8월) 회사재건형도산법(11월 입법예정) 회사분할법(내년중 입법예정) 등을 마련했다.
미국도 레이건 행정부 때 설치한 경쟁력정책위원회(위원장 대통령)를 여전히 가동하고 있으며 금융 통신산업을 세계 최고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독일 영국 등도 각각 총리가 위원장을 맡는 ‘연구기술혁신회의’와 ‘경쟁력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反재벌정서가 문제
▽뿌리깊은 반재벌 정서가 걸림돌〓한국은 93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처음으로 가동했지만 민간경제단체 대표들만 참여해 ‘논의만 무성했지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올해 초 전경련이 ‘국가경쟁력전략회의(가칭)’를 열자고 정부에 요청했지만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
재벌 전문가들은 “뿌리깊은 반재벌 국민정서 때문에 정부가 민관협력에 미온적인 것 같다”고 평가한다. 재벌들과 한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정경유착이나 개혁후퇴의 빌미를 살 수 있다는 것.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역대 정권은 현실적으로 정권유지를 위해 대기업의 협조를 구하면서도 국민정서상 재벌때리기를 하는 모순된 처지에 있었다”면서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재벌개혁은 힘들다”고 말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