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싱가포르前총리 방한계기 ‘아시아적 가치’ 재논란

  • 입력 1999년 10월 25일 20시 01분


‘아시아적 가치’는 카멜레온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 대 90년대 말 금융위기의 원흉, 효율적인 국가관리론 대 독재정권의 합리화론….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70, 80년대 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권의 경제적 성과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시작된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계기로 소강상태를 맞는 듯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세 속에 아시아 각국이 나름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지난주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전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국내에서 다시 논란이 불붙고 있다.

▼“고도성장 비결”찬사▼

▽‘아시아적 가치’는 유교〓50년대 말 마오종산(牟宗三) 쉬푸콴(徐復觀) 등 당대 중국의 석학들이 유교 부흥을 선언하고 나섰을 때만 해도 막스 베버를 비롯한 서양학자들이 유교에 대해 내렸던 ‘반(反)자본주의적’이라는 평가가 뒤집힐 전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70, 80년대에 이르자 서양에서 오히려 고도 성장을 하고 있던 동아시아 국가의 비결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투웨이밍, 로저 에임스, 데이빗 홀 등 서양에서 활동하는 학자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함재봉 유석춘 등이 연이어 옹호자로 나섰다.

가족주의, 공동체 중심주의, 상하의 엄격한 위계질서, 사회적 도덕성과 책임감, 농경사회의 저축습관, 교육 중시 등이 아시아적 가치의 핵심으로 꼽혔다. 특히 가족주의는 자본주의사회의 복잡한 ‘제도’를 대신해 ‘거래비용’ 절약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유교적 자본주의’의 장점으로 평가됐다. 공동체중심주의와 엄격한 위계질서는 개발도상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는 이른바 ‘유교적 민주주의’의 원동력으로 평가됐다.

▼IMF이후 부정적 시각▼

▽IMF를 맞은 ‘아시아적 가치’〓97년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로 ‘아시아적 가치’는 재평가돼야 했다.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가족주의를 정경유착과 부패의 원인으로, 공동체 중심주의와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는 합리적인 자본주의사회의 제도 마련을 방해한 독재의 근원으로 비판했다.

미국 조지 메이슨대의 프랜시스 후쿠야마교수와 고려대 이승환교수 등은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경제모델이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아시아적 가치를 지지했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개발 독재’를 이끌어 온 당사자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김대중대통령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확립이 시급함을 강조하며 “가장 큰 장애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변명과 저항”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논쟁은 진행 중〓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적 추세 속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각국의 문화적 전통에 입각한 발전모델을 추구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김우창 김여수 등 일부 학자들은 아시아적 가치를 재구성해서 아시아만의 특수한 가치관이 아닌 보편적 가치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 편입 모색▼

이러한 논의는 아시아인이 이제 단순한 서구의 추종을 넘어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구, 경제력, 군사력 등에서 자신들의 비중에 걸맞는 몫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충격 이래 동양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등의 형식으로 논의됐던 아시아적 발전모델은 아직 미완의 과제이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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