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라는 정치적 격변은 독일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찾아왔다.
통일 이후 많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은 아직 미완성의 ‘반제품’이다. 40여년 동안 쌓였던 분열의 앙금이 짙게 남아있다.
통일후 구동독 지역 5개 주(州) 어디에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상점에 진열된 상품도 구서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로도 5000㎞가 새로 단장됐다. 구동독 지역 도로 철로 전화망의 확충을 위해 해마다 각각 100억마르크씩이 투입됐다.
구동독 지역의 기업은 1만여개에서 무려 50만개로 늘어났다. 자동차는390만대에서 700만대로, 전화는 180만회선에서 800만회선으로 증가했다.
동독 지역 근로자의 임금은 통일전에 서독의 39%였으나 이제는 80∼90%까지 높아졌다. 고령자 연금도 서독의 85%까지 올랐다.
베를린 장벽 붕괴후 구동독에 투입된 자금은 모두 1조5000억마르크로 구서독 국내총생산(GDP)의 4∼5% 수준이다. 이는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후 유럽복구를 위한 마셜플랜에 투입한 자금은 미국 GDP의 2.5%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동독지역의 실업률은 17∼18%로 서독지역의 두 배가 넘고 일부 지역은 25∼30%나 된다. 독일 인구의 20%인 구동독지역 주민의 수출기여도는 2%, 세금분담률은 10%에 불과하다. 양독간 경제적 격차는 크다.
정신적 정서적 괴리도 깊다. 두 지역 주민들은 각기 다른 담배와 술을 마신다. 일상적으로 보는 신문이나 TV채널도 다르다. 동서 베를린 주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베를린 장벽’이 남아있다.
최근 총선에서 민사당(동독 공산당 후신)은 구동독지역에서 19.8%를 득표한 반면 구서독지역 득표율은 1%에 불과했다.
구동독 주민은 아직도 민주주의나 시장경제에 익숙하지 못하다.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구서독 주민은 28%지만 구동독 주민은 40%다.
동서독 주민을 갈라놓은 거리감은 독일인의 새로운 정체성의 개발로 해소될 것이다. 양독간 조화를 이뤄가는 데에는 베를린 천도도 도움이 될 것이다. 97년 여름 오데르부르크 홍수 때 구조와 복구작업을 함께 벌인 것은 균열된 독일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이 재난이 그동안 잊혀졌던 ‘동포 의식’을 일깨웠다.
독일은구동독 공산주의 잔재의청산과사회주의적 시장경제에바탕한구서독의 현대화 등 동서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하는 유일한 국가다.
이 엄청난 과제는 인내를 요구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빨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독일 통일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우리의 진지한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우리는 2차 대전 후에 직면했던것과비슷한세 가지의 과제를안고있다.우리는 피폐한 나라를 재건해야 한다. 전후(戰後) 1200만명의 난민이 독일로 몰려왔지만 이제는 1600만명의 구동독인을 포용해야 한다. ‘과거의 짐’을 떠맡아야 하는 것도 유사하다.
이제 소매를 다시 걷어붙이고 행동에 나서는 일만 남았다. 2차 대전 후의 놀라운 발전을 다시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정리〓구자룡기자〉bonhong@donga.com
▼테오 좀머 약력▼
△68세 △독일 튀빙겐대, 미국 하버드대 졸업(역사학 정치학 전공) △주간지 ‘디 차이트’ 정치부장 편집국장 공동발행인(현) △독일 함부르크대 교수△독일 연방 국방부 수석계획참모△주요 저서〓‘1935∼40년 열강들 사이에서의 독일과 일본’ ‘먼 나라로의 여행’ ‘독일 고찰’ ‘미래로의 여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