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에 내가 느낀 존재의 부재감과 가벼움은 내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도 나는 똑같은 것들을 느꼈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면서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하루 종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라디오는 내게 온 세상의 소식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말 나의 생각인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정말 나의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11세 때의 일이었다.
22세 때도 나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때 나는 하버드대를 갓 졸업하고 뉴욕에서 다섯 명의 낯선 사람들과 방 다섯 개짜리 아파트를 함께 빌려 생활하고 있었는데 곧잘 바뀌곤 했던 내 동거인들의 교육 수준은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마약중독자, 백수건달도 있었다.
30세가 되던 해에 나는 뉴욕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내 여자친구와 나는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5년간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는데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부모님의 반복적인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됐을 때 나는 우리가 성적인 문제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의 압박 같은 것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 상대방과 함께 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커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이 자기 개인의 목표와 관심사 외의 더 큰 세상과는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사회적 붕괴현상의 일부였다.
갖가지 민권운동과 여성운동 등이 일어난 후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온 사회적 제한들이 그 힘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개인적인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러나 자유와 함께 우리를 찾아온 것은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귀찮게 결혼을 할 이유가 뭐 있어? 가족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거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답이 너무 복잡하고 변덕스러워서 도무지 답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지금 나는 마이애미에서 새로운 여자친구와 살고 있다. 얼마 전 뉴욕에 갈 일이 있어서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나는 22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나의 내면에서 미래에 대한 약속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아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자아는 우리가 문명을 창조해 나가는 데 필요한 환상일 뿐이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이 집중할 때 우리가 불안해지는 것은 자아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아와 영혼의 차이점이다.
▽필자〓데이비드 새뮤얼스(잡지기고가)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5/selfish―samuel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