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어디로/사회 혼란]"과거는 싫고 경쟁은 두렵고"

  • 입력 1999년 11월 7일 20시 47분


91년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는 총체적 혼란 속에 90년대를 보냈다. 총리가 2류국이 됐다고 자인할 정도로 러시아의 현재 분위기는 암울하다. 12월 총선과 내년 6월 대선을 거치면서 보리스 옐친시대가 막을 내리지만 정권교체에 대한 희망도 크지 않다. 러시아는 과연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러시아의 오늘과 내일을 5회에 걸쳐 해부한다.

모스크바대 러시아어 강사인 이리나 예브게예브나(56)는 대학생인 딸 마리나(22), 그리고 마리나의 두살된 딸과 함께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산다. 남편과는 오래전에 이혼했고 딸 마리나도 20세 때 미혼모가 됐다.

이리나가 받는 2000루블(약 10만원)의 월급은 러시아 평균월급 1584루블(7월 현재)보다 많지만 세 식구가 살기에는 빠듯하다. 그나마 공공병원에 가면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고 분유가 공짜로 배급되는 것이 다행이다.

▼ 무상교육-평생직장 '뚝'▼

아파트와 모스크바 근교의 다차(별장)가 그녀의 전재산. 틈날 때마다 다차에 딸린 텃밭에서 감자와 양배추를 가꿔 기본적인 식량을 해결한다. 옷과 구두를 마지막으로 산 것이 언제였는지, 언제 마지막 외식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리나는 대다수의 러시아 지식인처럼 보리스 옐친 집권 초기에는 그를 지지했으나 현재는 더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 과도기의 일시적 고통으로 여기며 참았던 혼란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은 가난을 참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 더 큰 문제다.”

▼ 청소년 자살률 美 2배 ▼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58%는 개혁정책이 시작된 85년 이전을 그리워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무상교육과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과거에서 냉혹한 경쟁사회로 변한 현재가 엄청난 ‘퇴보’다. 좌절한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으로 고통을 잊으려 하고 신흥 종교나 신나치 같은 극단적 주장에 빠지기도 한다. 미국 조지타운대 머레이 페시바크 교수에 따르면 15∼19세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살률은 미국보다 2배나 높다.

빈부격차도 좌절의 원천이다. ‘노비예 루스키(신러시아인)’로 불리는 졸부들의 과소비는 구소련의 노멘클라투라(특권계층)보다 심하다. 올 여름 남부 유럽에서 하루에 수만달러씩 주고 호화요트를 빌린 사람들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라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 일상 생활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마피아의 폐해도 심각하다. 작은 구멍가게를 시작해도 마피아가 달려든다.

공중보건체계가 마비돼 질병도 크게 늘었다. 10∼14세 소녀의 매독이 90년 이후 50배 이상 늘었고 2002년에는 에이즈 환자가 2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92년부터 인구가 줄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자연재해수준’이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2025년에는 현재 인구보다 900만명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 "2류국가 전락" 자인 ▼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지난달 “러시아는 2류국가로 전락했다”고 자인했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자인에도 불구하고 단시일 내에 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만큼 위기의 뿌리가 깊고 크기 때문이다.

▼ "소수민족 축출" 新나치단체 부상…러민족연합 단원 5만명 넘어 ▼

러시아의 사회적 혼란을 틈타 신나치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대표적인 신나치 단체인 러시아민족연합(RNE) 지도자 알렉산드르 바르카쇼프가 12월 총선 출마자격을 얻었다. 바르카쇼프가 연합정당인 ‘스파스’당의 비례대표로 등록하자 법무부는 이 당의 등록취소를 대법원에 요청했으나 대법원은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RNE의 주축은 16∼18세의 청년들. 머리를 빡빡 깎은 이들은 검은 옷에 군화를 신고 군대식 행진과 나치식 경례를 한다.

이들의 목표는 러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유태인 등 소수민족을 몰아내고 ‘러시아인만을 위한 러시아’를 만들자는 것.

RNE 소속원들은 외국인에게도 적대적이다. 지난해 모스크바주재 미 대사관 소속 흑인 해병 2명이 이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RNE는 단원이 5만명을 넘어섰으며 군 경찰뿐만 아니라 정계에도 지지세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빅토르 일류힌 하원 안보위원장과 예비역 장성인 알베르트 마카쇼프 하원의원이 지난해 RNE의 반유태주의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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