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어디로/추락한 경제]개혁실패로 시민들 고통

  • 입력 1999년 11월 8일 20시 16분


러시아 정부는 92년 전격적으로 ‘가격자유화’ ‘국유재산사유화’ 등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구소련 시절 텅빈 국영상점과 줄서기에 지친 러시아인들이 갈망하던 서구식 시장경제로의 대변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모르고 살던 러시아인들은 또다른 고통을 겪게 됐다. 살인적인 물가상승, 루블화 폭락에 이어 산업기반이 붕괴하면서 국내총생산(GDP)이 해마다 곤두박질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한달 800루블(약 4만원)의 연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는 류다 안토노브나 할머니(71)는 “70년 동안 공산당이 아무리 선전해도 안 믿던 사회주의경제의 장점을 사회주의를 포기한 후 절실히 깨닫고 있다”는 말로 요즘 자신이 겪고 있는 생활고를 설명했다.

러시아 국가통계위원회에 따르면 90년 4879달러이던 1인당 GDP가 98년에는 2835달러로 격감했다. 한반도의 80배 면적에 1억4700만명의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지난해 GDP가 2767억달러로 한국의 3231억달러보다도 훨씬 적다.

경제적 혼란속에 이득을 본 집단도 있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안드레이 즈바노프(36)는 자본주의에 재빨리 눈을 떴다. 공부를 포기하고 암달러상으로 나서 밑천을 마련해 ‘보따리장사’에 뛰어들었다. 기차와 비행기를 집 삼아 살면서 고생한 덕분에 이제는 의류수입상과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사장님’이 됐다.

부패한 관료와 결탁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올리가르흐(재벌)도 등장했다.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재벌들은 알짜배기 국영기업이 시장에 나오는 대로 ‘사냥’해 갔다. 95년 당시 32세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이끄는 메나테프은행은 연간 매출액이 27억달러나 되는 러시아 제2의 정유회사 유코스의 지분 78%를 3억달러에 인수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세르게이 두비닌 당시 중앙은행 총재가 호도르코프스키를 지원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지난해 8월 밀어닥친 외환위기를 계기로 급진적 경제개혁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미국 하버드대 제프리 삭스 교수 등 서방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미국식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추구했던 예고르 가이다르 전 총리조차 최근 들어 “무리한 개혁이 혼란을 가져왔다”고 실토했다.

이에 따라 12월 총선과 내년 대선을 앞두고 러시아 정치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요소를 가미한 온건한 경제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영국 에섹스대 김병연(金炳椽)교수는 러시아가 앞으로 국내산업 보호 등에 주력하면서 외국의 간섭을 배제한 독자적인 경제발전을 모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 경제는 올들어 루블화 폭락으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진 의류 식품 등의 분야가 살아나고 최대 수출품목인 원유가격이 상승해 2∼3%의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 경제가 이미 바닥을 쳤기 때문에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낙관론을 내놓기도 했다.

▼루블貨가치 끝없이 폭락▼

1달러에서 1루블을 빼면? 정답은 1달러. 왜냐하면 루블은 휴지나 다름없기 때문.

가치가 땅에 떨어진 러시아 루블화를 비웃는 우스개다. 루블화의 가치폭락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 하나 더. 미국정부는 86년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 건물을 장기임대하면서 월 임대료로 6만달러 상당의 루블화를 주기로 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거대한 건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매월 단돈 13달러를 주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97년 8월 견디다 못해 루블화 가치를 1000배로 절상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구 화폐에서 세자리의 0을 떼어낸 신권을 발행해 인위적으로 루블 대 달러 환율을 6000대 1에서 6대 1로 끌어올린것이다.

그러나 98년 8월 금융위기 이후 루블은 다시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웬만한 상점에는 상품가격이 달러로 표시되어 있다. 러시아인들은 돈이 생기면 곧바로 달러로 바꾼다.

루블은 ‘조국’에서 천덕꾸러기가 됐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