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번 TV에 나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전쟁을 잘 치르고 있으며 나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는 다시 흑해 연안 소치, 모스크바 근교 루시, 고르키9 등의 별장으로 휴양을 떠난다.
▼정치적 기반 취약▼
‘존재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옐친 대통령의 근황이다. 외신들은 옐친의 집무 시간이 하루 수십분도 안된다고 전했다.
국정에서 사실상 손을 놓다보니 옐친의 파워는 이미 종이호랑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연루된 비리 수사를 지휘하던 유리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을 경질하기 위해 상원에 해임안을 제출했으나 3차례 모두 부결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91년 6월 러시아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된 옐친은 두달 후 구소련 공산당 보수파와 공모한 군부의 쿠데타를 격파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 옐친은 마치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듯 계속 점수를 잃었다. 옐친의 추락은 러시아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옐친의 몰락을 초래한 가장 큰 요인은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는 점.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구공산당을 91년 해산시켰으나 대신 강력한 여당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현재 러시아 국가두마(하원)는 옐친을 타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공산당(149석)이 장악하고 있으며 옐친을 지지하는 제2당 우리집러시아당은 불과 66석을 보유, 옐친에게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옐친의 즉흥정치와 무능, 부패한 재벌들과의 결탁도 국민이 등을 돌리는 요인이었다. 지난해 8월 러시아가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을 때 옐친은 그의 무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8월14일 한 공장을 방문해 “루블화 평가절하는 절대 없다”고 선언했으나 사흘 뒤 평가절하가 단행됐다. 그는 위급한 러시아 금융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군통수권자로서의 능력도 의심받고 있다. 지난해 크렘린궁의 설문조사결과 민중폭동이 일어날 경우 발포명령에 거부하겠다는 장교가 97%나 됐다.
▼무능에 국민 등돌려▼
지금까지 옐친을 유지시킨 것은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등 재벌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과 서방의 지원이었다.
96년 대선에서 옐친은 선거홍보팀을 급파한 미국 등 서방의 지원과 러시아 재벌의 재정적 지원, 언론의 편파보도 등에 힘입어 대중적 인기가 훨씬 높은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수를 제치고 재선될 수 있었다.
옐친은 건강도 좋지 않다. 지금까지 그는 14번이나 입원, 올해 기네스북에 의해 국가수반이 된 후 가장 많이 입원한 정치인으로 뽑혔다.
옐친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면 2000년 8월 후임자에게 권좌를 물려주게 된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퇴임 이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그에게 불리하다.
▼대통령측근 5인방 국정 쥐락펴락▼
현재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파워그룹은 ‘패밀리’로 불리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측근 5인방.
옐친의 차녀로 대통령 이미지담당 보좌관인 타티야나 디야첸코를 비롯해 △전직 크렘린궁 비서실장 발렌틴 유마세프 △크렘린궁 총무수석 파벨 보로딘 △로고바스그룹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회장 △시브네프티의 로만 아브라모비치 회장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5인방은 국정에서 거의 손을 뗀 옐친을 대신해 국가의 주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수시로 디야첸코의 집무실에 모여 러시아의 중대사를 처리한다.
러시아 언론은 12월 총선과 내년 대선 연기설, 러시아와 벨로루시 통합후 옐친 재집권설 등은 5인방이 흘린 것이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베레조프스키와 아브라모비치가 디야첸코와 유마세프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국영기업 민영화 과정 등에 개입해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고 전했다.
또 보로딘은 러시아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거두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옐친 퇴임 후 안전보장과 재벌 등 기득권층의 이익수호. 지난해 3월 이후 무려 4명의 총리가 경질된 것도 이들의 ‘밀실정치’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