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끌어들인다는 원칙에서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을 지지해 왔지만 막상 북한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대상국들에게 ‘한국과의 사전협의’를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정부가 남북관계는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일방적인 대서방 관계개선을 ‘우려’해 ‘속도조절’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일고 있다.
이같은 기류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최근 어록에서 드러난다. 김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필리핀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어 한국과 충분히 협의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또 지난달 9일 독일 경제지인 한델스블라트와의 회견에서도 “유럽국가들이 북한과 접촉할 때 사전에 한국 정부와 충분한 협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이 미―일과의 관계개선 움직임에 이어 북한이 최근 유럽연합(EU)국가들과의 수교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해 “남북관계는 진척이 없는데 북한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니냐”는 국내 비판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달 EU국가들과 제2차 정치회담을 개최했고, 이탈리아와의 수교를 눈앞에 두고 있다. 또 호주 및 필리핀과도 수교협상에 나설 태세다. 정부당국자들은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을 찬성하나 남북관계의 진전 속도가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도 최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일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가 한국보다 선행되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면서도 “진정한 평화와 안정은 남북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