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공화 양당의 이데올로기 차이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그래도 두 당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의 하나가 낙태권 인정여부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여성의 권리를 중요시해 낙태권을 인정하는 반면 공화당은 여성의 권리 이전에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살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며 낙태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73년 로 대(對) 웨이드(Roe verse Wade) 사건에서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이후 낙태가 합법화됐다. 그래서 낙태문제를 살인행위로 접근하고 있는 기독교계 보수주의자 또는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의 낙태 반대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특히 이들은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을 이루면서 공화당 대통령 예비후보들에게 낙태문제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비후보 가운데 스티브 포브스, 앨런 키즈, 게리 바우어가 대통령이 되면 낙태반대론자들만 연방판사와 대법원판사에 지명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뒤 본선에서는 낙태에 찬성하는 여성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낙태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유리하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이 내버려둘 리가 없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낙태문제가 단골이슈로 등장했고 후보를 곤경에 빠뜨리는 ‘지뢰밭’으로 비유돼 왔다.
이번 선거에서 지뢰를 밟은 첫 후보는 공화당의 온건성향을 대표하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 그는 26일 “만약 열다섯살짜리 당신의 딸이 임신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자의 즉석질문에 “가족과 상의하도록 하겠다”고 말해 마치 상의여하에 따라 낙태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답변했다. 강경 보수세력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산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화당의 선두주자인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는 이 문제가 불거질 것을 두려워해 아예 기자회견을 사절한 지 오래며 26일 TV 토론회에서는 낙태에 반대한다면서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며 모호하게 예봉을 피했다.
민주당에서는 앨 고어 부통령이 낙태찬성론자로 자처해온 것과는 달리 80년대 하원과 상원의원시절 줄곧 낙태에 반대하는 법안이나 예산안에 찬성해온 것으로 드러나 곤욕을 치르고 있다. 고어부통령은 80년대에 작성한 메모에서 “임신한 순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셈이며 이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라고 표현해 낙태반대론자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73년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해왔다고 주장해온 고어부통령측은 최근 한발 물러서 낙태반대론에 경도된 적이 있지만 최근 10년간은 낙태 찬성론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의 유일한 당내 경합자인 빌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은 고어부통령의 의정활동 중 낙태에 대한 찬성률이 82%에 불과하다면서 이 문제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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