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총리 자문기구인 ‘21세기 일본의 구상 간담회’는 1월18일 일본이 21세기에 지향할 방향을 제시한 보고서를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보고서를 만든 주역인 가와이 하야오 간담회 의장 등 4명이 8, 9일 이틀간 한국을 방문해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김태동(金泰東)위원장 등과 양국 위원회의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김위원장과 가와이의장은 이와 별도로 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나 한일(韓日) 양국이 직면한 과제와 미래상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담 요지.
△김위원장〓한일 두나라 모두 20세기에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정치 민주화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라는 경제발전은 달성했지만 분단과 비생산적 정치, 비효율적 경제, 낮은 사회적 신뢰 등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가와이의장〓일본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 과정에서 크게 도움이 된 점이 21세기에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20세기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변혁의 축은 개인의 중시입니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아닙니다. 위로부터의 지도나 규제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밑에서부터 공(公)을 중시하는 ‘협치(協治)’가 필요합니다.
△김위원장〓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개인을 확립하는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등 어느 나라에서도 필요하겠죠. 21세기에 필요한 개인, 미래지향적 개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일본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가.
△가와이의장〓보고서에서 저희는 여러 가지 제언을 했습니다. 가령 선거권을 18세에 부여해 책임감을 갖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자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는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과와 사고방식을 영어를 통해 다시 확인하고 국제성을 갖도록 하자는 의미입니다. 또 의무교육과정의 법적 최저 수업일수를 주 3일로 축소하자는 안도 냈습니다.
△김위원장〓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한국에서도 반향이 컸습니다. 특히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인터넷 콘텐츠의 70∼80%가 영어로 되어 있어 국제간 대화 능력은 곧 영어 구사력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나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많아져야 하겠지요. 결국 개인이 여러 언어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 학교교육은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를 안 하거나 대학 졸업 후에는 학벌만 믿고 노력 없이 직장생활을 합니다. 이 때문에 학벌위주 사고방식을 버리자는 ‘신지식인 운동’도 나오고 있습니다. 저도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대학의 낮은 경쟁력 때문에 고민과 노력을 합니다만 일본은 어떻습니까.
△가와이의장〓일본도 한국과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웃음) 하지만 개혁 움직임도 있습니다. 가령 대졸이 아니라도 수학(修學)능력만 있으면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또 교수와 학생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방향으로도 가고 있습니다. 충분히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을 시키지 않거나 유급시키는 풍토가 대학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김위원장〓한국에서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취임후 추진한 4대 개혁에 정부개혁이 포함돼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협치’를 위해 정당과 관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가와이의장〓지금까지 일본은 관료중심인 위로부터의 규제와 지도로 사회를 잘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이 같은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위로부터의 규제와 지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선구적 사고방식을 지닌 정치가나 관료 중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관료주도의 역사가 워낙 길어 이를 바꾸려면 상당한 노력과 고통이 필요하겠지요.
△김위원장〓개인은 아무래도 힘이 약하므로 비정부기구(NGO)나 비영리기구(NP0)를 결성해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시민단체의 역할이 커졌는데 일본의 현상과 전망은 어떻습니까.
△가와이의장〓일본은 NPO가 약했습니다만 특히 고베 대지진때 많은 자원봉사자가 참여한 것을 계기로 사회를 위한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보고서에서 시민단체 기부에 대한 면세를 제안했는데 정부도 긍정적입니다.
△김위원장〓귀 위원회 보고서에 유학생이 학위를 취득하면 영주권을 부여하는 내용 등 이민문호 개방이 포함된 것을 보았습니다. 21세기는 ‘지식기반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국 국민의 지식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이웃나라 인재가 모여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본 국민이 외국인이나 외국 문화에 대해 무엇을 고쳐 나가야 할까요. 또 한국에 대해 바라는 점은...
△가와이의장〓일본은 외국인이 와서 살기 힘든 나라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일본적 경향을 바꾸기 위해 이민 문호 개방을 제안했습니다. 일본에 유학온 외국 인재가 공부를 마친 뒤 다른 나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만 앞으로는 일본에서 계속 활약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일본은 ‘열린 국익’을 필요로 합니다.
△김위원장〓한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패권국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적으로 1등 국가가 아니라 질적으로 이웃나라로부터 존경을 받는, 최소한 멸시를 받지 않는 파트너가 돼야 하며 이를 위해 적극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반도, 그것도 4강의 이해가 교차되는 지역이라는 점도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4강이 한국을 서로 파트너로 삼으려고 하는 나라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가와이의장〓전적으로 공감합니다. 21세기는 패권추구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공조가 필요한 세기가 될 것입니다.
△김위원장〓한국과 일본은 20세기에는 서양에서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동서양이 쌍방향으로 배우고 어깨를 겨루는 대등한 관계가 되도록 해야죠. 한일 양국 국민이 어떤 나라보다도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정리〓권순활기자>shkwon@donga.com
▼김태동 위원장 프로필▼
△53세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 예일대 경제학 박사 △미 일리노이대 조교수, 한국국제경제학회 사무국장, 경실련 정책연구위원장,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역임 △현 성균관대 교수 △저서 ‘6공 경제학’ 등
▼가와이 의장 프로필▼
△72세 △일본 교토대 이학부 졸업, 미국 스위스에서 심리학 연구 △교토대 교수 등 역임, 심리요법을 통한 국제문화비교의 세계적 권위자 △현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소장, 교토대 명예교수 △저서 ‘가와이 하야오 저작집’(전 14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