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체첸을 가다(上)]폐허의 그로즈니

  • 입력 2000년 5월 23일 19시 29분


《1994년 1차 전쟁에 이어 다시 지난해 10월 재연된 체첸전쟁. 체첸전은 2차대전후 손꼽히는 열전의 현장이지만 외부세계에는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짓밟고자 하는 작은 공화국 체첸은 어떤 곳이고 어떤 사람들이 피의 항쟁을 계속하고 있을까. 본사 김기현 모스크바특파원이 현지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왕복 3000㎞가 넘는 길을 러시아군 수송기와 헬기 등을 이용해 달려갔다.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모습, 체첸인의 고단한 삶, 체첸인과 똑같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러시아군의 실상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19일 오전 체첸 주둔 러시아군 통합사령부가 있는 한칼라 기지를 출발한 2대의 러시아군 장갑차가 러시아군이 점령한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로 출발했다. 필자를 포함한 몇몇 외국 기자도 완전무장한 병사들 사이에 끼어 장갑차 위에 걸터앉았다.

불도저로 밀어 만든 황톳길을 따라가던 장갑차가 그로즈니로 가는 간선도로에 들어서자 엉겨붙은 차량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낡은 차들이 그로즈니로 들어가는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서 몇 ㎞씩 길게 늘어서 있었다. 동행한 러시아군 공보관 알렉세이 바신 대령은 “피란민이 되돌아오는 등 그로즈니가 정상화되고 있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로즈니가 가까워지면서 곳곳에서 폭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파괴된 건물과 불에 그을린 채 뒤집힌 버스의 잔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말 체첸군이 진격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마지막 방어선을 폈던 순자강(江) 다리를 지나 도심으로 들어서자 흙먼지와 연기 사이로 폐허의 도시가 펼쳐졌다.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본래 모습을 간직한 것은 러시아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뿐이었다.

“오 마이 갓(하나님 맙소사).”동행한 프랑스 르 피가로지의 여기자 로라 만데빌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분쟁지역만 취재했다는 이탈리아 일간지 코레레 델라 세라의 렌초 찬파넬리 기자도 “자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참혹한 파괴와 살상행위를 저지른 현장은 처음 보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완전히 부서져 뼈대만 남은 대통령궁에는 벌써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기자들이 장갑차에서 내려 폐허 속으로 걸어가자 병사들이 서둘러 제지했다. 아직도 지뢰와 부비트랩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

노점이 들어선 시장으로 들어서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갑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져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로즈니 시민들은 모스크바에서 온 외신기자들을 둘러싸더니 쌓인 울분을 털어놓았다.

“도대체 어디서 사느냐”고 묻자 대부분 “지하실과 방공호에서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그로즈니를 탈출한 대부분의 시민들과는 달리 비오듯 퍼붓는 폭격과 치열한 시가전 속에서 전기 가스 수돗물도 없이 용케 버틴 사람들이다.피란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노약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하루하루를 지내왔다고 말했다. 피란길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사람들도 잿더미로 변한 도시의 처참한 몰골에 놀라 반쯤 넋이 빠진 듯한 표정들이었다.

1994년 1차 체첸전 당시 러시아군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 폭격을 자제했으나 이번에는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시민들은 공습과 로케트포 공격이 절정이던 지난해 10∼11월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고 증언했다.

노점에는 야채와 식료품을 비롯해 조잡한 물건들이 나와 있었다. 40루블(약 2000원)에 신분증과 통행증 등 모든 종류의 증명서를 판다는 벽보도 보였다. 젊은 남자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클라브디아 지민나라는 할머니는 “러시아군이 젊은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가는 바람에 모두 숨어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러시아군 병사가 “체첸 청년들은 남부 산악지대로 도망가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시민들과 병사들 사이에 언쟁이 붙었다. 한 병사는 “체첸남자들은 열살만 돼도 모두 총을 쏠 줄 아는데 어떻게 민간인과 반군을 구별할 수 있느냐”며 민간인을 보호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18∼19세의 여성 저격병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러시아군이 꾸며낸 거짓말”이라며 항의했다. 한 여인은 병사를 밀치며 “이 나쁜 놈들아 우리를 다 죽여라”고 외쳤다.

시민들과 러시아군은 서로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는 듯했다. 이 때문에 밤이 되면 시민들도 러시아군도 모두 겁에 질린다. 그동안 총성이 울리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즈니 시민들은 러시아 정부나 국제기구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정교회 성당 지하실에서 산다는 한 할머니는 지난 8개월 동안 410루블(약 1만7000원)의 구호금과 두 차례 빵을 받은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대부분이 러시아 병사들이 건네주는 먹다 남은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는 것.

한 러시아군 장교는 파괴된 그로즈니는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항복해 피해가 없는 제2의 도시 구데르메스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점령지의 행정을 관할하는 위수사령부와 러시아 대통령이 파견한 체첸 주재 대표부도 모두 구데르메스에 있다.

30만명이 모여 살던 카프카스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그로즈니가 페허로 변한 모습을 둘러본 외국기자들은 모두 말을 잊었다. 폐허 속에서 그로즈니 시민들은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런데도 외부 세계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인류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로즈니=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체첸 주변의 오늘

세계적인 장수촌(長壽村) 카프카스 지역이 체첸 사태로 인해 화약고로 변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카프카스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이 지역은 물과 공기 그리고 기후가 좋아 지상의 마지막 낙원으로 꼽히던 곳.

1991년 소연방의 해체로 아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야, 아르메니아가 독립했고 체첸도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면서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체첸에 질 좋은 유전이 있고 카스피해 유전과 유럽을 잇는 송유관이 지나고 있다는 경제적 이유와 인근 공화국으로 독립 열기가 옮겨붙을 것을 두려워해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94년 전격적으로 체첸을 침공했으나 체첸군은 게릴라전으로 맞서 2년 만에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8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체첸 전역이 황폐해지고 난민사태로 카프카스 전역이 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8월 체첸측이 인근 다게스탄공화국을 침범해 카프카스에 이슬람공화국을 세우려 하자 러시아군이 10월 체첸을 침공해 2차전쟁이 시작됐다. 러시아군은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북부 평야지대를 점령했으나 체첸군은 남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게릴라전으로 맞서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체첸인들의 대(對)러 독립투쟁은 뿌리가 깊다. 19세기 러시아의 명장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장군은 용맹한 체첸인을 겨우 정벌한 후 수도를 ‘무서운 곳’이라는 뜻의 ‘그로즈니’로 이름붙였을 정도.

체첸인들은 40년대와 70년대에도 소련정권을 상대로 항쟁했으며 스탈린은 아예 체첸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체첸인들의 반러 감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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