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을 가다]꺾이지 않는 '항전'의지

  • 입력 2000년 5월 24일 19시 47분


러시아군은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점령한 뒤 2월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체첸 반군의 주력을 완전히 궤멸시켰기 때문에 남부 산악지대의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작전만 남았다고 밝혔다.

‘소탕’ 현장을 보기 위해 18일 체첸 북부 세베르 공항을 떠나 러시아군의 Mi8수송헬기를 타고 ○○기갑연대가 주둔하는 체첸 남서부 우르스 마르탄으로 향했다.

러시아군의 이동은 대부분 헬기로 이뤄진다. 차량으로 이동하면 매복한 체첸 게릴라에게 당하기 쉽기 때문. 한 러시아군 장교는 체첸의 3분의 2 지역을 점령했다는 공식발표와는 달리 “주요도시와 간선도로를 장악하고 있을 뿐”이라고 실토했다.

▼반군 산악게릴라전 수행▼

호수와 숲이 펼쳐진 평원 위를 20분쯤 날아 카프카스 산맥 바로 밑에 착륙했다. 탱크와 막사가 포진한 연대본부는 깊은 참호로 둘러싸여 있었다. 멀리 남쪽의 산악지대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체첸군이 저항의 근거로 삼고 있는 곳이다.

카프카스 산맥의 길이는 1000㎞.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산(5642m)도 그 중의 하나. 얼른 보기에도 험준한 골짜기와 고지를 샅샅이 뒤져 반군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첸군은 주로 야간에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거나 이동하는 병력을 기습한다. 반면 러시아군은 공중정찰과 수색을 통해 반군을 찾고 있다.

T62탱크를 타고 수색대를 따라나섰다. 10분쯤 지나 최전방 초소에 도착했다. 초병들이 초음파탐지기로 전방의 움직임과 소리를 하나 하나 확인하며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마다 지뢰매설-기습▼

참호 속에서 경계 중인 블라디미르 코스친 하사(25)는 지원병. 제대 후 고향 니제노브고로드의 한 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다 전쟁이 터지자 다시 자원입대했다. 94년 1차전 때도 체첸 전선에서 싸웠던 그는 “사회보다는 군이 더 좋다”고 말했다. 체첸 참전병으로 지원하면 월급이 늘어 3000루블(약 12만5000원)을 받는다.

체첸전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도 “이런 상황에서 무서움을 타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고 말했다. 다른 러시아군들도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시 탱크를 타고 내무군 46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탕기 추 마을로 향했다.

이 마을은 체첸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직후인 3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서 러시아군 대령이 술에 취해 18세 소녀를 강간하고 목졸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터지자 러시아군의 인권유린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범행을 저지른 대령은 체포됐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현지 주민들은 극도로 화가 나 있다. 기자가 마을 주민들을 만나려고 하자 러시아 장교는 “귀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며 제지했다.

46연대 부연대장인 세르게이 치브란코프 중령은 “오늘은 교전이 없는 운 좋은 날”이라며 “그러나 수색대가 진지 주변에서 40여개의 82㎜지뢰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대원들이 아침마다 밤새 반군들이 묻어놓은 지뢰 찾기에 바쁘다”며 “조금 전에 지나온 길이 지금도 안전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아주 오래 갈것"▼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한 장교는 끝없이 이어진 산맥을 가리키며 “무슨 전쟁말인가. 이곳은 100년도 넘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19세기 러시아가 체첸을 점령한 후 차르(옛 러시아 황제)도, 스탈린도 이 지역만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이 장교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예언하듯 말했다. “전쟁은 오래갈 것이다. 아주 오래….”

▼체첸인 왜 용감한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러시아와 체첸간의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르스마르탄의 진지에서 만난 한 러시아군 장교는 남쪽의 험준한 산악지대(체첸 게릴라군의 활동무대)를 바라보며 “체첸 남자는 모두가 일당백의 전사(戰士)”라고 한숨지었다.

카프카스에 모여 사는 80여민족 중에 체첸인은 용맹함과 난폭함의 대명사. 농경이 힘든 산악지대에 살기 때문에 이들은 목축과 약탈로 생계를 이어왔다. 사내아이가 10세가 넘으면 아버지가 총과 칼을 준다. 특히 체첸 남자들에게 총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

서슬퍼런 구소련시절에도 체첸인들은 무장하고 있었다. 당국은 해마다 마을을 포위하고 무기를 압수했는데 40년대에는 한번에 20만정의 무기를 찾아낸 일도 있었을 정도. 그러나 체첸인들은 돈만 생기면 또 총부터 구했다.

‘체첸 마피아’는 러시아의 범죄조직 중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모스크바의 도매시장 상권은 이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체첸인들의 꺾을 수 없는 항쟁정신은 수백년 동안 러시아와 터키 등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길러졌다. 이슬람교도인 체첸인들은 슬라브정교를 믿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하드(성전·聖戰)로 생각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94년 1차 체첸전 당시 18∼19세의 어린 러시아 병사들(징집병)은 험상궂은 체첸 전사들을 보면 겁부터 냈다. 이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주로 지원병들을 전투에 투입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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