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D-13/인터뷰]한반도문제 석학 스칼라피노

  • 입력 2000년 5월 29일 19시 27분


《동아일보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등 동아시아 문제에 관한 세계적 석학인 미국의 로버트 A 스칼라피노 박사(81·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와 단독 특별회견을 가졌다. 회견은 아시아 재단의 비공개 세미나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의 숙소인 도일 호텔에서 26일 진행됐다.》

“남북정상회담은 매우 희망적인 신호입니다. 남북간의 오랜 적대와 이질화가 마침내 종식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스칼라피노 박사는 남북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북간의 경제협력증진과 이산가족 상봉 등의 이슈는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안보 및 평화문제에 대해선 진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정일(金正日)노동당 총비서가 정상회담에 응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경제 재건을 위해선 한국과의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경협은 북한의 입장에선 다른 국가들과의 경협 가능성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정상회담이 잘 진행된다면 남북간의 경협은 더욱 확대되고 개선될 것입니다. 김정일은 매우 신중하고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북한을 개방키로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이탈리아 등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이런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이는 북한 지도부가 구질서(old order)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정상회담에 관해 한미간에 다소의 견해차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을 한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은 남북간의 경협과 화해 방안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미간의 그같은 시각차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미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항상 군사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선 북한의 핵동결 이행여부에 관한 사찰 조건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다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현재 한미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북한 핵 문제 등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우선적 의제로 다뤄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들이 남북 정상간의 대화에 어떤 식으로든 포함은 돼야 하겠지요. 한미간의 차이는 이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제기하느냐에 관한 것일 뿐 근본적 차이는 아닙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개발을 포기할 것으로 보시는지요.

“과거엔 북한의 유일한 바겐 칩(협상수단)은 군사력 사용에 관한 위협뿐이었고 다른 협상 카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핵과 미사일 개발을 통해 미국 등과 흥정을 할 수 있게 됐고 특히 미사일은 외화획득을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사일 개발은 모든 국가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로 누구도 이를 제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지역과 세계경제에 보다 깊이 관여하게 될수록, 또 한국 및 외국과의 우호관계가 증진될수록 생존을 위해 무기개발보다는 다른 채널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기에 대한 의존이 약해집니다.”

―북한이 최근 대외관계 개선을 위해 외교적으로 총력을 경주하는 것은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까.

“북한이 미국 일본이나 김대중 정부에 대해 때로는 매우 자극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것은 북한의 변화가 어디까지, 얼마나 빨리 진행돼야 하는지에 대해 내부적으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큰 그림으로 볼 때 김정일과 측근들은 대외관계의 변화에 관해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유럽 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1990년대 초만 해도 아주 사이가 안좋았던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한 것은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 종전과 같은 전략적 연대는 모색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으로선 현재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이 없는 실정입니다. 외교관계를 재설정한 국가들과도 실무차원의 대화만 하고 있어요. 대외관계 개선은 북한의 생존을 위한 핵심 이슈 중 하나입니다.”

―북한체제와 김정일 정권의 장래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나는 북한이 조기에 붕괴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군부와 밀접히 협력하고 있었고 북한엔 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전체주의를 합성한 나름대로의 생존 시스템이 마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이제 과거의 방식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북한엔 새로운 위험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분야의 변화는 곧 정치 쪽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므로 중국이 당면한 문제들을 앞으로 북한도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북한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변화는 느리게 진행될 것입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이를 서두를 수 없는 것은 북한의 딜레마입니다.”

―김정일총비서에 대해선 상반된 평가가 있는데 박사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국외자들은 그가 어떻다고 권위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를 둘러싼 루머는 많지만 그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김정일은 매우 똑똑하고 북한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훈련을 잘 받은 것 같습니다.”

―김정일총비서가 변화와 개혁의 모델로 삼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까.

“북한은 현 단계에선 어떤 나라도 모델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만 박정희(朴正熙) 시대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박정희 시대는 매우 성공적인 경제 개발과 정치적 전체주의, 강한 군사 통치를 결합했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매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겠지만요.”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스칼라피노 교수 약력

△1919년 미국 캔자스주 출생

△1948년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1949∼90년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교수, 이후 명예교수

△1978년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동아시아연구소 설립, 90년까지 소장 역임

△북한 4차례 방문(89, 91, 92, 95년)

△미 학술원 회원(1992∼)

△‘한국의 공산주의’ 등 저서 38권, 미국의 아시아 정책 등에 관한 논문 500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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