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선택2000]"고어는 준비된 대통령"백악관 입성 확신

  • 입력 2000년 7월 26일 18시 50분


모처럼 가족 여행을 떠났으나 아이들이 부모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다툴 때 이들을 조용히 재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앨 고어 부통령의 연설을 녹음해 들려주는 것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너무 지루해 아이들이 금방 잠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한 TV 방송이 고어 부통령의 이미지를 빗대 방영한 풍자극의 한 대목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8년 집권에 이어 정권 재창출에 나선 민주당은 고어 부통령에 대한 이같은 인식을 불식하고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의 능력을 최대한 홍보하는 것을 수성(守成)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사실 고어 부통령은 똑똑하고 박식하다. 국정 전반을 훤히 꿰뚫고 있고 특히 외교 안보 환경 분야에선 전문가 수준이다. 컴맹이 대부분인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손바닥만한 휴대용 컴퓨터 단말기를 갖고 다니며 E메일도 체크하고 인터넷도 직접 검색한다. 천재 소리를 듣는 로렌스 서머스 재무장관이 “고어 부통령은 정책을 결정하기 전 세부적인 내용까지 모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할 정도.

외교 경제 분야의 참모인 제임스 새서 전 주중대사와 로라 D 타이슨 전 국가경제위원회 의장도 고어 부통령에겐 정기 브리핑을 하지 않는다. 본인이 워낙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러나 학자풍에 때로는 독일병정 같기도 한 고어의 ‘완벽한’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는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고어의 측근들도 인간적 매력이 없는 것을 그의 최대 단점으로 꼽는다. 고어가 최근 학창시절 성적이 사실은 신통치 않았다며 자진해서 성적을 공개한 것도 이같은 지적을 의식한 것.

민주당은 사상 최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경제가 대선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미국 역사상 경제가 좋을 때 여당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 워싱턴포스트지의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경제성장이 고어의 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가 좋은 것은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 때문이지 정치인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 그래도 민주당은 낙관적이다. 앞으로 TV 토론회가 열리면 유권자들이 고어 부통령과 부시 주지사의 자질 차를 분명히 깨달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클린턴 행정부 이전에 공화당이 12년을 집권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클린턴 인기 상한가…정권재창출 도움 기대▼

“청중은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10일 연단에 오를 때 점잖게 박수를 쳤다. 이틀 뒤 앨 고어 부통령이 찾았을 때는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그리고 다음날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방문하자 영웅을 맞듯 열광했다.”

최근 볼티모어에서 열렸던 미국 유색인종약진전국연합(NAACP)의 연례 총회에 관한 뉴욕 타임스지의 14일자 기사는 퇴임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의 인기가 여전히 높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인기는 흑인과 소수 민족 사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3선을 금지한 헌법 때문에 이번 대선에 출마할 수는 없지만 만약 출마한다고 가정할 경우 부시 주지사를 압도적으로 누를 것이라고 말하는 미국인들이 많다.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도덕성에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력과 대중적 친화력이 당대 최고라는 데는 거의 이론이 없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그를 대선에 최대한 활용하려 하고 있고 공화당은 ‘클린턴 변수’를 걱정하고 있다.

민주당은 다음달 14일 전당대회 첫날 클린턴 대통령을 등장시켜 초장부터 유권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킬 예정이다. 고어 부통령이 여론조사에서 부시 주지사에게 뒤지는 만큼 클린턴의 카리스마를 빌려 역전의 발판을 만들겠다는 것.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럴 경우 전당대회의 주인공인 고어 부통령보다 클린턴 대통령이 더 각광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하루 속히 클린턴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는 고어에게 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이래저래 클린턴 대통령은 내년초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 레임 덕 현상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게 미 정치분석가들의 중론이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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