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푸틴 집권3개월 의회-재벌장악 권력기반 굳혔다

  • 입력 2000년 7월 27일 18시 47분


보리스 옐친의 급작스러운 퇴진으로 무명의 정치신인에서 일약 크렘린궁의 주인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48). 그는 치열한 권력싸움을 얼마나 견딜까 하던 의구심을 떨치고 집권 3개월만에 권력기반을 완전히 굳혔다. 국제무대에서도 강력한 외교력을 발휘하고 있다. 추진력과활동력, 짧은 정치경력에 어울리지 않는 노회함과 치밀함으로 정국을 장악한 것이다.

▽3개월 집권 성적〓벌써 전임자 옐친의 8년 업적보다 많은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원 제1당인 공산당을 무력화해 의회를 장악한 후 조세법 등 개혁법을 제정했다. 전국을 7개 연방지구로 나눠 대통령전권대표를 파견, 중앙정부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또 지방에서 ‘황제’ 행세를 해온 주지사의 상원의원 겸직을 금했으며 대통령의 주지사 해임권과 지방의회 해산권을 신설했다.

돈을 무기로 정계를 흔들어온 재벌도 장악했다. ‘언론계의 황제’로 불리던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미디어―모스트 회장이 한때 구속됐으며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로고바스그룹 회장은 하원의원직을 내놓았다.

옐친의 측근과 재벌, 지방 주지사의 지원으로 집권했지만 집권후에는 이들을 제거해왔다. 허를 찌르는 깜짝쇼와 서슴없이 적과 손을 잡는 과감함,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쓰는 노련함이 무기. 한때 제휴했던 공산당은 동향 출신의 공산당 2인자 겐나디 셀레즈뇨프 하원의장을 탈당하도록 부추겨 쪼개버렸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3%가 푸틴이 ‘잘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못한다’는 응답은 7%에 지나지 않았다.

푸틴은 또 활발한 정상외교를 통해 무기력했던 러시아의 영향력을 회복했다. 미국이 추진중인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에 끝까지 반대하는 뚝심을 보이면서도 실리는 다 챙겼다. 경제지원요청을 할 때는 태도를 바꿔 끈질기게 매달리는 방법으로 독일 일본 영국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관계 개선을 위한 북한 방문시에도 채무 탕감 요구는 냉정히 거절하는 등 실리 외교노선을 지키고 있다.

▽인간 푸틴은 누구〓악명높은 구소련 비밀경찰(KGB)요원 15년 경력, 유도 검은 띠의 스포츠광(狂). 무뢰한 같지만 실은 명문 레닌그라드대 법대를 나온 경제학 박사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실력 하나로 대통령에 오를 만큼 의지가 강하다.

러시아 남자답지않게 보드카를 멀리 하고 ‘일 중독자’란 말까지 들을 만큼 일 욕심이 많다. 과묵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 KGB시절 ‘터미네이터’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연극과 영화를 좋아하고 한때 문학에도 심취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가족도 국제적 감각이 있다. 푸틴이 KGB요원으로 5년간 독일에서 근무한 덕분에 전 가족이 독일어에 능통하다. 스튜어디스 출신의 부인 류드밀라는 레닌그라드대에서 스페인어와 영어를 전공한 재원. 독일에서 태어난 두 딸은 현재 모스크바의 독일어학교에 다니고 있다.

▽푸틴의 인맥〓‘페테르마피아’라고 불리는 고향 사람과 KGB출신이 주변에 포진해 있다. 그러나 이용가치가 없어진 사람은 가차없이 제거하는 용인술 때문에 목숨을 걸고 옐친에게 충성했던 ‘우랄마피아’ 같은 가신(家臣)그룹은 없다. 옐친시절의아나톨리 추바이스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같은 2인자도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푸틴은 대신 모든 것을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다.

▽취약점〓석유수출에 의지해서 연명하는 경제 때문에 서방에 대해 목소리를 줄곧 높일 수만은 없다. 또한 KGB 출신이기 때문에 막후에서 결정한 다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어서 ‘음모’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법에 근거한 독재(dictatorship of the law)’로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견지하고 있다.

▼푸틴정부 버팀목 KGB/'젊은 대통령' 브레인역할▼

구 소련 비밀경찰조직인 국가보안위(KGB)는 푸틴 정부의 버팀목이다.

국민을 감시하며 ‘철의 장막’을 지켰던 KGB의 조직은 사라졌지만 KGB출신은 여전히 각계각층에 포진하고 있다.

야당시절 KGB를 미워했던 보리스 옐친 전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KGB를 해체했지만 재임 중 3명의 KGB출신 총리를 쓸 수밖에 없었다. 푸틴과 정통 KGB맨으로 대외정보부(SVR)장을 지낸 예브게니 프라마코프, 역시 SVR부장을 지낸 세르게니 스테파신이었다. 이들은 음지에서 일해온 탓에 상대적으로 청렴했으며 유능하고 책임감과 애국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45년간 KGB에 근무했던 필립 보브코프 전 KGB 제1부의장은 “외부세계의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KGB에는 애국심과 사명감이 강하고 유능한 인재가 모여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언론인도 “소련시절 특권과 출세 길을 찾아 많은 엘리트가 KGB를 지원했으며 푸틴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닫혀있는 소련사회에서 해외근무 기회가 많은 직장이란 점 때문에 KGB는 유능한 젊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푸틴도 동독에서 5년간 근무하며 국제감각을 익혔다. 소련당국은 KGB요원을 키우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푸틴이 업무에 강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것도 그같은 투자의 결과라는 것이다. KGB라는 엘리트 집단에 근무했던 점이 인맥형성에도 도움을 줬다.현재 푸틴 정권의 실세인 빅토르 이바노프 안보회의(CB) 서기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크렘린궁 차장, 집권 연합당의 보리스 그리즐로프 원내총무 등은 KGB시절 푸틴의 동료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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