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다룬 이색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베트남 지포의 초상화 89점’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에서는 여든아홉개의 지포 라이터가 30여년전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말없이 증언했다.
지포 라이터 표면에는 마약, 섹스, 죽음 등 전쟁터의 암울한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미 언론이 ‘지포 아트(Zippo Art)’라고 이름붙인 이번 전시회는 중견 화가인 브래드포드 에드워즈(45)가 5년간의 준비 끝에 마련한 것.
베트남 참전 군인의 아들이기도 한 에드워즈는 전쟁 당시 미군들이 향수를 달래고,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포 라이터에 새겼던 낙서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작품으로 연결지었다.
‘베트남전’을 주제로 삼아온 에드워즈의 작품들은 정작 베트남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번에 전시된 지포 라이터들의 사진이 담긴 도록(圖錄)은 베트남 당국의 검열에 걸려 판매가 금지됐다. 작품 전시회도 기약없이 연기됐다.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지포 라이터는 참전 군인들의 ‘캔버스’ 였다.
병사들은 전쟁터 참호에서 틈틈이 조개껍질이나, 유리조각, 뾰족한 돌조각 등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 지포 라이터 표면에 즉흥적인 시를 쓰고, 반사회적 구호도 새겼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군인들의 ‘작품’들을 가르켜 ‘트렌치(trench·참호 ) 아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5만8000여명의 미군이 죽어간 베트남전에서도 ‘트렌치 아트’는 왕성했다. 베트남전에서는 300만개가 넘는 지포 라이터가 병사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마리화나를 나눠 피는 모습, 갖가지 형태로 묘사한 베트남 여자와의 뜨거운 섹스, 해골과 묘비명이 그려진 지포 라이터에서는 낯선 땅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잊고자 하는 병사들의 몸부림이 생생히 느껴진다.
지포 라이터는 이들의 욕망과 공포, 분노를 분출하는 비공식적인 ‘자유 지대’ 였던 셈이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6∼67년 사이에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 이름없는 병사가 지포 라이터에 새겨놓은 자조적인 싯귀절에서는 이념과 정치의 희생물이 돼 버린 미군들의 지친 마음을 고스란히 엿볼수 있다.
“아무런 의지가 없는(Unwilling) 우리들은/ 자격 없는(Unqualified) 지휘관 밑에서/ 성취할 수 없는 (Unattainable) 일을 하고 있다/ 고마워하지 않는(Ungrateful) 사람들을 위해….”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