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마키아벨리 평전' 詩人처럼 따뜻했네

  • 입력 2000년 8월 4일 18시 37분


근대 서양 정치사상의 기원을 연 16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 사상사에 있어서 그의 공적은 정치영역이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나아가 정치행위가 종교적 규율이나 도덕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한 데 있다. 탈냉전후 좌우 이념대립이 퇴색해가는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통찰은 의연히 관철되고 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에 대한 20세기 최고의 전기로 평가받는 것이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이다. 1953년이래 1978년까지 25년 동안 개정과 증보를 거듭한 7판이 마침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다.

리돌피는 15, 16세기 피렌체의 사상과 문화에 관한 독보적인 학자다. 평전에서 그가 특히 강조하는 바는 마키아벨리가 정치가이자 예술가이며 무엇보다도 ‘시인’이라는 점이다. 리돌피에게 마키아벨리는 ‘냉혹한 현실 정치를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데 흥미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언제나 예술가와 시인의 즉흥성과 열정 및 이상 속에 녹여내는 묘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에 대해, 사악한 행위가 선한 행위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 정치세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비정한 격류 속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것과 선한 행위를 보호하기 위해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전개하는 마키아벨리의 고뇌를 만나게 된다.

아울러 리돌피의 ‘평전’은 종래 열띤 학술적 논쟁이 되어온 이른바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반메디치파)인지 군주정 옹호자(친메디치파)인지. 만약 그가 공화주의자라면 후일 메디치 궁정에 들어가 ‘피렌체사’를 저술한 일견 기회주의적인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지.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오랫동안 피렌체 공화국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실로 판단한다면 공화주의자였음이 분명한데 반해, 그후 메디치 지배하에서도 정계에 복귀하고자 시도했으며 말년에는 메디치 궁정에 봉사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군주론’이 군주정을 옹호하는 내용이고 나아가 메디치 군주에게 헌정되었는 데 반해, ‘리비우스 논고’는 공화정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공화주의자들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견 모순된 사실이다. 이에 대해 리돌피는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를 옹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를 파당에 관계없이 펜과 재능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문관으로 자임한 데서 온 결과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사상의 일관성은 오히려 비르투(인간의 덕성 및 역량)와 포르투나(유동적인 행운 또는 운명)의 대결로 압축되는 그의 세계관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세계관이 마키아벨리 사상에서 언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가이다. 종래 서구학계는 ‘군주론’ 집필 당시(1512∼1513년)에 비로소 그 세계관이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리돌피는 이러한 해석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온 마키아벨리의 한 편지가 종래의 해석과 달리 1506년9월에 씌어진 것임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그것이 ‘군주론’ 집필 훨씬 이전에 이미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이는 마키아벨리 연구 100년만의 대발견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역사상 최고의 평전이 바로 ‘군주론’을 헌정받은 메디치가(家)의 후예인 리돌피에 의해 씌어졌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의 헌정은 당시 메디치가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는데 450년이 지난 후 비로소 그 후손에 의해 최고의 평전으로 ‘보답’을 받은 셈이다.

역자인 곽차섭 부산대교수는 리돌피의 필생의 역작을 번역하기 위해 지난 6년동안 각고의 심혈을 기울였다. 마키아벨리 삶에 관한 세세한 사항, 복잡한 논쟁을 꼼꼼하게 옮기면서도 번역체의 문투를 전혀 남기지 않았으며 필요에 따라 해박한 지식이 담긴 역주를 붙인 점이 돋보인다.

▼'마키아벨리 평전:시인을 닮은 한 정치가의 초상'/ 로베르토 리돌피 지음/ 아키넷/ 697쪽, 3만원▼

◆마키아벨리 어록

“조국의 존망이 걸려 있을 경우, 수단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것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목적은 조국의 안전과 자유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한 사람이어야 한다. 지휘권이 복수의 인간에게 분산되어 있는 것 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 …나는 단언한다. 같은 권한을 주어 파견한다면, 두 사람의 우수한 인물을 파견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의 범인을 파견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고.”

“인간이란 자기를 지켜주지 않거나 잘못을 바로잡을 힘이 없는 자에게 충성을 바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사람을 잘 쓸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에게 최근에 베푼 은혜로 그자가 품었던 묵은 원한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강정인(서강대교수·서양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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