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5돌 특집]새천년 한-일관계/반목서 화해로…

  • 입력 2000년 8월 10일 18시 55분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어도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

이는 일본인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자주 쓰이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규범을 철저히 지키지만 집단을 이루면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여러 사람이 신호위반을 하면 홀로 원칙을 지키려 하는 것보다는 집단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도 들어있다.

광복 55년.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아는 데도 이 속담은 유용하다.

최근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9월 아사히신문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13%, ‘싫다’고 한 비율은 12%였다. 1% 포인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이 차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84년 이후 몇 년 간격으로 6차례 실시한 조사 결과 ‘좋다’고 한 사람이 ‘싫다’고 한 사람보다 처음으로 많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예전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던 군위안부나 독도문제, 각료들의 망언 등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는 현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월드컵축구 공동개최와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개방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98년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앞으로 한국이 먼저 과거문제를 꺼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도 호감을 샀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일본인들은 요즘 개인적으로 한국인을 만나면 “선조들이 한국에서 나쁜 짓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곤 한다. 물론 이것이 일본의 전부는 아니다. 이는 혼자서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의 태도나 마찬가지다.

▼일본인들 한국호감도 높아져▼

여럿이 모이면 달라진다. 국가차원이 되면 더욱 그렇다. 현재 일본을 이끄는 집단은 자민당이고 이 자민당의 키는 보수 우익세력이 쥐고 있다. 이들에게 일본은 여전히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국가’다. 한일 관계가 악화돼 반성하라는 말이 들리면 “한번 했으면 됐지 뭘 다시 반성하라는 것이냐”고 투덜댄다.

이런 심정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단체가 96년 발족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다. 이 모임이 지난해 10월 펴낸 ‘국민의 역사’라는 책은 수십만부가 팔려나갔다. 일본이 잘못한 게 뭐 있느냐는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빨간 신호등이 켜져있지만 떼지어 건너는 행렬처럼 보인다.

일본의 이런 양면성은 지구상의 유일한 핵피해 국가임을 내세워 일본이 핵 철폐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과 반드시 일본은 핵무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함께 존재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뒤 일본의 첫 번째 반응은 축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경계심을 발동했다. 바로 ‘통일 한국’에 대한 경계심이다. 한국이 통일되지 않고 현 체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일본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그룹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한국인의 일본관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한’과 ‘선망’을 동시에 표시해 왔다. ‘한’은 일본에 대한 배타심과 거부감으로 표출됐다. ‘선망’은 일본은 본받아할 점이 많은 국가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은 일본어를 열심히 익히고 있다.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210만여명(98년 현재) 중 45%, 95만여명이 한국인이다.

▼日 '통일한국' 경계심 여전해▼

그러나 이제는 일본을 이분법적인 차원에서 재단하는 태도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일본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제 ‘마이웨이’다. 경제대국을 넘어 정치, 군사대국을 꿈꾸고 있다. 일본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를 위해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다. 이런 일본을 상대로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더 이상 효과가 없다. 또한 ‘그까짓 일본쯤 얼마든지 따라 잡을 수 있다’라는 설익은 애국심도 설득력을 잃었다.

이런 일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일본에서 볼 때는 한가지뿐인 것 같다. 이제 ‘과거의 잣대’로만 일본을 보려는 태도를 버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일본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전략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예전의 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속에 묻혀 있는 한 일본은 언제나 ‘죄많은 나라’이고 언제든지 한국이 능가할 수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할 때라는 말이다.

최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재일동포를 상대로 재일동포 2세인 김양기(金兩基) 도코하(常葉)학원대학 교수는 ‘복안(複眼)사고’를 가지라고 충고한다. 복안사고란 ‘나는 한국인인가, 아니면 일본인인가’를 따지기보다는 ‘한국과 일본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란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이다. 이같은 충고는 최근 재일동포사회에서 민단계나 조총련계를 가리지 말고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까지 포함, ‘코리안’으로 부르자는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인이 일본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참고할 만한 것이다. 일본을 ‘왜놈’ ‘쪽발이’가 아닌 ‘일본’으로 볼 때만 한국과 특수한 관계를 가진 일본과 세계 속의 일본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克日 집착벗고 새 파트너로▼

한국과 일본이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행사가 남아 있다. 일본 천황의 한국방문이다. 한국 정부는 2002년 월드컵 개최 이전에 방한해 주길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망설이고 있다. 불상사를 우려해서다. 일본 천황의 방한시기와 그 결과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가능성을 재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 같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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