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삼윤의 문명과 디자인]피카소 '게르니카'

  • 입력 2000년 8월 20일 18시 57분


마드리드에는 파리 못지 않게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다. 그 중에서도 프라도박물관과 소피아왕비미술관이 유명하다. 프라도는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처럼 19세기까지 활약한 고야, 엘그레코, 베라스케스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데 반해 92년에 문을 연 소피아왕비미술관에는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20세기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유리와 철골구조로 된 이 현대식 미술관은 파리의 오르세미술관과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관람객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제7호실.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게르니카는 워낙 큰 그림(7.8m×3.5m)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 앞으로 몰려들어도 앞사람을 밀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검은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에는 할 말을 다 못 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사람, 죽은 아이를 부등켜 안고 목이 빠져라 흐느껴 우는 어머니, 옷이 벗겨지건 말건 아량 곳 하지 않고 어서 빨리 빠져나가려는 여인,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다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 쓰러지며 울부짖는 말, 근엄한 표정을 짖고 있는 황소 등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다. 평온과 정상은 어디에도 없고 일상이 파괴된 데 따른 고통과 분노, 절규, 탈출, 죽음이 존재할 뿐이다.

게르니카 마을이 있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는 들소가 그려진 선사시대의 동굴벼화유적이 있다.

작품의 제목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26일 독일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맞아 비극의 상징적 장소가 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그때 스페인은 인민전선파와 공화파간에 죽고 죽이는 내란 중이었는데 나치 독일이 프랑코가 이끄는 인민전선파를 지원한답시고 평화스런 그곳을 공습, 수많은 아녀자와 노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것이다.

당시 스페인 공화정부로부터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던 피카소는 게르니카 공습 소식을 파리 신문을 통해 접했다. 그는 1주일 정도 밑그림을 그리고는 곧바로 작품 제작에 들어가 한달 뒤인 6월 4일 게르나카를 완성했다. 작품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전문가들로부터는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이란 찬사를 받았다.

그가 만약 전쟁의 모순이나 그에 따른 비참함을 그리려 했다면 무기나 폭격장면, 아니면 군인, 비행기 등과 같은 것을 소재로 잡았을 만 한데 웬일인지 그런 것들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대신 그런 물질적인 것들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강타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의 변화를 상징적이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공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누구 못지 않게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제했다. 흑과 백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마치 선과 악, 평화와 폭력을 강렬하게 대비시키려는 듯.

게르니카는 그의 어느 작품보다도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이후 여인을 주로 등장시킨 큐비즘 계열의 그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도 그는 이 작품을 한 달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제작했다. 그것은 이 작품 속에 나타난 요소들이 그의 내면세계에서 오랫동안 숙성과정을 거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투우장을 찾았다. 그때부터 투우(Toro)에 빠졌던 그는 일흔살이 넘어 젊은 애인들과 함께 투우장을 찾았을 정도로 투우광이었다. 투우에 관한 그림 또한 많이 그렸다.

드넓은 원형의 모래밭에서 마타도르는 황소와 생사를 건 고독한 혈전을 벌인다. 아무 죄 없는 황소는 목숨을 잃는다. 미노타우로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투우를 보면서 그 옛날 아테네 왕국의 테세우스 왕자가 크레타 섬으로 건너가 그곳 ‘미로(迷路)의 궁전’ 속에 사는 인신우두(人身牛頭)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미노스의 황소란 뜻)’와 사생결투를 벌이는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이는 게르니카를 그리기 직전 화상(畵商) 볼라드의 부탁으로 제작한 판화들 속에 미노타우로스를 그린 것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데서도 증명된다. 그는 폭력과 암흑의 상징으로 미노타우로스를 게르니카에 등장시킨 것이었다. 모두가 울부짖으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유독 혼자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으로.

로마 시대 이래 스페인의 상징이 된 투우경기는 마타도르(투우사)와 검은 황소와의 대결로 압축된다. 아주 단순한 경기지만 그 대결 모습이 투우사마다 달라 하루 4,5회 개최되는 경기가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야구팬들이 의외의 홈런과 에러에 열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투우에도 의외성이 존재한다. 마타도르에게 있어 황소는 쓰러뜨려야 할 적이다. 황소는 아무 잘못이 없는 데도 쓰러져야 하고 또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미노타우로스의 후예이니까. 마치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원죄를 저지르고 만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것처럼.

스페인은 크레타와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크레타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해 무수한 대작을 남긴 엘그레코(크레타 사람이란 뜻)라는 화가에서 보듯이 내용적으로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크레타에서의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와의 대결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스페인 땅에선 투우로 나타났다가 대규모 살육이 아무렇게나 자행된 20세기에 들어서는 게르니카란 대작까지 탄생시킨 것이다.

신화는 새롭게 해석되고 변신을 거침으로써 생명력을 이어가고 그 생명력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것임을 게르니카는 또 다른 입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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