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사랑의 역사’ 같은 드라마까지 즐기던 자하로바는 혹시 하는 마음에 가끔 TV를 켜보며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TV가 사라진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전화로 동네 주부들과 수다떨기도 하지만 이내 지쳐버린다. 곰곰이 따져보니 예전에 하루에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적어도 4∼5시간은 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신문판매-비디오 대여 급증▼
재향군인회 지부에서 일하는 남편 아나톨리(57)는 예전에는 늘 TV를 끼고 사는 아내에게 면박을 줬었다. 그는 저녁뉴스밖에 보지 않았다. 어제는 아나톨리가 아내를 위해 퇴근길에 비디오를 몇개 빌려와서 함께 봤지만 아내는 별로 신이 나지 않는 눈치다. 저녁 뉴스를 보며 아들과 정치에 대해 토론할 시간인 오후 9시경 아나톨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은행원인 아들 블라디미르는 아침뉴스를 보며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다. TV가 사라지자 그는 대신 몇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라디오를 듣는다. 퇴근 후에는 인터넷으로 TV를 보려고 시도하지만 안좋은 전화선 사정 때문에 동영상이 끊겨 짜증만 난다.
신문에는 여전히 TV 프로그램이 나오지만 스베타 가정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공중파 TV 방송이 끊긴 뒤 2∼3개월 동안 TV가 나오지 않는다면 생활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전화 여론조사에 대해 948명이 심하게 바뀔 것이라고 대답했고 1422명은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TV없이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TV 없는 삶에 당황하고 있다.
비디오가게가 전에 없이 붐비고 퇴근길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들고 집에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저녁이면 기온이 10도 안팎으로 선선해져 밖에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집에 머물러야 하는 많은 모스크비치들은 ‘TV가 주고 간 시간을 죽이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다. 가용(可用) 시간이 늘었지만 무엇을 할지 몰라 허둥대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번 화재로 빈부격차 같은 사회문제도 드러났다. 어떤 사람들은 TV 대신 라디오라도 들으면서 날씨라도 알려고 애쓰는데 어떤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TV를 즐길 수 있다.
▼방송탑 정상화 몇달 걸릴듯▼
현재 방송이 중단된 것은 3대 방송으로 불리는 관영 RTR ORT와 민영 NTV 등 공중파 방송. 그러나 유료인 위성방송과 유선방송은 여전히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위성 및 유선방송 가입자가 크게 늘고 있다. 400∼500달러의 설치비를 받는 위성방송 NTV+는 이번 기회에 현재 160만가구인 가입자 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위성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인구를 500만명 정도라고 보면 모스크바 지역 주민 가운데 1100만명 정도가 TV를 박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
재벌언론의 위세도 입증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집권 후 언론재벌인 미디어모스트와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그러나 이번 화재로 NTV+와 TNT 등 위성과 유선방송망을 갖고 있는 미디어모스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ORT와 RTR는 당분간 미디어모스트의 방송망을 빌려야 방송을 할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걸고 오스탄키노를 복구할 예정이다. 그러나 방송이 정상화되려면 적어도 몇 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