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인터뷰]"휠체어 생활도 아이디어 못막아"

  • 입력 2000년 10월 4일 19시 25분


‘전자예술의 미켈란젤로’ ‘테크놀로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씨(68)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5년. 하지만 그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초인적인 예술혼으로 레이저 아트를 개척하고 있다.

올 봄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에는 개관 이래 가장 많은 25만명의관람객이 몰렸고,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가 예정돼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비디오 아티스트인 아내 구보타 시게코와의 공동 전시가 추진되고 있다.

최근 뉴욕 맨해튼 소호 뒷골목 그의 작업실 겸 자택을 ‘급습’했다. 그의 숨겨진 ‘내부’를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70여평의 작업실 한가운데에는 더블베드와 싱글베드가 있다. 더블베드는 백씨의 휴식 겸 작업공간이고 싱글베드는 구보타씨의 침대다. 양말을 신기는 했지만 남보다 두배 가량 솟아 있는 그의 발등에 자꾸만 안쓰러운 시선이 간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하루에 100m는 꼭 걸어. 저녁 식사 후에 지팡이를 짚고 50m를 걷고, 밤에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두 번 다녀오니까 또 50m가 되지. 죽기 전에 한번 원 없이 걸어보면 좋겠는데…. 하지만 걱정하지마. 2010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커다란 쇼를 한 뒤에야 죽어도 죽을 테니까.”

그에게 2010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 해다. 한국 나이로 80세가 되고 정신적 스승인 전위 음악가 고(故) 존 케이지의 탄생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까지 작품활동을 하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내가 몇 년째 신약을 먹고 있는데 10년을 먹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해. 뇌에 맺힌 피가 풀리면 걸음도 걸을 수 있을테니 악착같이 그때까지는 살아야지. ‘깔치(애인의 은어)’ 데리고 산보도 해보고 죽을 테야. 예쁜 여자를 차지한 놈들에게는 질투를 느껴 주례도 하지 않았지.”

―한국에서 서울 강북의 현 기무사 자리에 백남준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경기 김포시에서도 비슷한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성의는 고마운데 하필이면 왜 군대가 있던 자리야. 박정희대통령이 죽은 자리라는 것도마음에 걸리고…. 기왕이면 인근의 내가 다니던 경기중 자리였으면 좋겠어. 김포시에는 우선 2010년까지 매년 10만달러씩 내 작품을 구입해 주면 좋은 컬렉션도 되고 나에게 투자하는 셈도 된다고만 말해뒀어.”

―하루 일과는….

“오전 8시반에 일어나고 밤 10시엔 잠자리에 들지. 하루 한차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두 블록 떨어진 음식점에 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야. 머리는 오히려 잘 돌아가서 아이디어가 쉴새없이 샘솟아. 레이저 작업은 수학적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요즘 해석기하 책을 열심히 읽고 있지. 그 수식(數式)으로 4개의 작품을 만들어 놨어. 레이저 작품은 정말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후계자 양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내 작품 하기에도 바쁜데 후계자 기를 시간과 여가가 어디 있어. 후계 자리는 뺏어 가는 거지 물려주는 게 아니야. 언젠가 ‘센놈’이 나와 나를 능가하면 되는 거야. 국적도 가릴 것 없고….”

국내외 한국 작가 2, 3명을 거명해 줄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기자는 그의 ‘솔직무쌍’한 후계자론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엉겁결에 던진 질문이 하필 ‘죽음’에 대한 처리 방식이었다.

“선친께서 50대부터 지관을 데리고 산소자리 보러 다니셨는데 나는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어. 작가는 작품을 남기면 되지 무덤을 남길 필요는 없잖아. 내가 죽으면 그저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려주면 좋겠어.”

―부인과의 2인전이 서울과 일본에서 열린다면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보는데요.

“물론이지. 고대에는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문명이 전해졌고 현대에 와서는 일본을 통해 하이테크 기술이 한국에 전해졌어. 개인적으로는 2인전을 통해 그간 집사람에게 진 신세를 갚고 싶어. 내가 쓰러진 이후 이처럼 생명을 연장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사람 덕분이지. 꼭 은혜를 갚고 죽겠어.”

옆에 있던 부인에게 조크 삼아 도대체 어떻게 이 ‘특이한’ 사람을 좋아해 결혼에까지 이르고 23년간을 해로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부인의 답은 이랬다. 원문의 감동과 유머를 살리기 위해 영문으로 소개한다.

“He is sexy, and handsome. I am a stalker.”

<뉴욕〓오명철기자>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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