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고할 때 이런 표현을 즐겨 쓴다.
그의 일생이 고난의 연속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통령은 1925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해운업에 투신했다.
얼마 후 그는 해운업체를 차려 한때 배 15척을 운영하고 목포신문사를 인수하는 등 청년실업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정치 입문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했다. 결과는 낙선. 61년 강원 인제 보궐선거(5대)에 당선됐으나 사흘 만에 5·16이 터져 당선 등록도 하지 못하고 정치규제에 묶였다. 제대로 국회의원이 된 것은 63년 6대 국회 때였다.
70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선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김영삼(金泳三) 이철승(李哲承)씨와 겨뤄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후보에 지명됐다. 이듬해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맞서 46%의 지지를 얻을 정도로 선전했다.
그러나 그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유신을 통한 종신대통령을 꿈꾸었던 박정희정권이 그에 대해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기 때문.
73년에는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요원들에 의해 일본 도쿄(東京) 한복판에서 그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76년 그는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구속됐고, 80년에는 5·17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80년 당시 그는 ‘대통령만 빼고 뭐든 시켜주겠다’는 신군부의 회유를 거부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그의 열정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게 됐다.
82년 석방돼 미국 망명길에 오른 그는 3년 후 탄압을 각오한 귀국을 감행했으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후 두 차례의 대선 패배 후 1997년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 민족 화해의 기틀을 다졌다.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후에도 그는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연결 착공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추진 △국방장관 회담 △백두산 한라산 교차관광 등을 성사시켜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14번째 도전 끝에 이뤄낸 결실이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 처음 오른 것은 ‘6월 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의 물꼬가 트인 87년. 김대통령과 가까운 당시 서독의 사민당 의원들이 추천인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주로 외국인들에 의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장한 지도자로 해마다 후보로 천거됐다. 95년부터는 국내에서도 아태재단을 중심으로 추천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올해 후보추천은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이뤄졌기 때문에 추천사유에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한 노력은 명기되지 않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공적만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노벨위원회의 심사과정에서는 당연히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장기수 송환, 남북장관급 회담 등 일련의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조치들이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에는 지난해 ‘제2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상’을 수상한 것과 지난달 노르웨이의 라프토 인권상을 수상한 일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이 노벨위원회 사무국장인 게이르 룬데스타드 교수와 미국 망명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도 도움이 됐을 듯하다.
김대통령이 노벨상을 받기까지는 역경도 많았다. 올해에는 한나라당의 이신범(李信範)전 의원이 주도한 수상저지운동이 물의를 일으켰다. 95년엔 김대통령의 수상을 정부 차원에서 저지하려 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영묵·윤영찬기자>ym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