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성 고분자를 발견한 3명의 과학자에게 수여된 올해의 노벨화학상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업적에는 두 명의 한국인이 깊숙이 개입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플라스틱의 전도성 발견하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실험을 했던 변형직 박사(74)와 최초로 전도성 고분자를 만든 서울대 물리학부 박영우 교수(48)가 그 주인공들이다.
51년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원자력연구소에서 일해왔던 변 박사는 67년 해외 연수를 떠나 동경공업대 이케다 교수의 고분자화학 연구팀에 합류했다. 당시 이케다 교수의 조교였던 올해 노벨상 수상자 시라카와 히데키(白川英樹)박사(65)는 변 박사의 옆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 연구팀은 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유기반도체의 후보물질인 전도성 폴리에틸렌을 만드는 일에 몇 년 째 매달려 왔지만 진전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변 박사는 관련 논문을 읽고 흥미가 생겨 자신이 직접 이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촉매의 양을 바꿔 가며 전도성을 띤 고분자를 만드는 실험하던 어느 날이었다. 반응기를 가동하던 중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반응용액의 표면에 찬란한 은빛의 막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름이 빛을 반사한다는 것은 아세틸렌 분자가 일정하게 배열됐다는 의미이다.
자세히 보니 반응용액을 섞어주는 장치가 멈춰 있었다. “반응이 빨리 일어나게 하는 장치가 오히려 폴리에틸렌 필림의 형성을 막았던 것”이라고 변 박사는 설명한다. 변 박사는 신이 나서 그 결과를 이케다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뜻밖에도 이케다 교수는 화를 버럭 내며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하더군요. 계속 연구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며칠 뒤 시라카와가 와서 필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르쳐 달라고 해 알려주고 나중에는 연구노트도 주었습니다.”
몇 주 뒤 시라카와 박사도 실험에 성공했다. 필름의 전기전도성을 측정한 결과 부도체인 플라스틱의 수 만 배 값을 가지는 반도체로 밝혀졌다. 연수기간이 끝나자 변 박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제가 노벨상을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 박사는 자신의 이야기가 와전된 데 불만이 많다. 시라카와 교수는 노벨상을 받은 뒤 인터뷰에서 “당시 내 조수였던 한국 유학생이 일본어가 서툴러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촉매를 너무 많이 넣었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고 일본 언론에 밝혔다.
이에 대해 변 박사는 “시라카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9살 연하인 시라카와의 조수가 아니었을 뿐더러 1926년 생인 그가 일본어가 서툴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전도성 고분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시라카와는 9년 뒤인 76년 미국 펜실베니아대 화학과 앨런 맥더미드 교수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연구실에는 올해 노벨화학상을 함께 받은 맥더미드 교수와 함께 물리학과 앨런 히거 교수가 금속 수준의 전도성을 가진 고분자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연구실에는 7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유학을 온 젊은 청년 박영우씨(현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가 박사과정 학생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실험을 주도했던 인물은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대만 유학생 치앙 박사. 박영우씨는 그와 한 팀이었다.
“우리는 시라카와 교수가 만든 폴리에틸렌 필름의 전기전도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그 중 하나가 필름에 요오드를 증착시켜 필름의 표면 상태를 바꾸는 도핑법이었다.”
도핑된 필름의 전기 전도도를 측정하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플라스틱보다 전기가 수천억 배 잘 통하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박 교수는 그때의 흥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 연구 내용은 77년 물리학 최고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실렸다. 노벨상 위원회가 이번 업적에 기여한 논문으로 선정한 4개의 논문 중 하나이다.
“논문이 발표되자 학계가 술렁거렸습니다. 그때 벌써 노벨상 얘기가 나오더군요.” 박 교수는 자신이 이런 중요한 일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4년 반만에 학위를 마치고 1980년 약관 28세에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기자>alchimist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