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에 이어 재계도 등돌려▼
▽커지는 사임 압력〓도박업자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아온 사실이 폭로된 것은 11일. 그 후 수도 마닐라와 금융도시 마카티 등에서는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27일에는 필리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들로 구성된 마카티 비즈니스클럽도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230명의 회원 중 96%가 사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정계 종교계에 이어 재계마저 등을 돌린 것이다.
이달 초 야당의 테오피스토 긴고나 상원의원이 의회에서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불법 도박을 비호해준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고 폭로했을 때만 해도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11일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30년 지기이자 일로코스수르 주지사인 루이스 싱손이 “에스트라 대통령은 2년간 1100만달러 가량의 뇌물을 받았으며 돈 심부름꾼이 바로 나였다”고 폭로하자 기름을 끼얹은 듯 불길이 번졌다.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은 다음 날인 12일 항의의 뜻으로 겸직했던 사회복지부 장관을 사퇴했다.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은 86년 ‘피플 파워’ 운동을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나와 에스트라다의 사임을 요구했다. 아키노 전 대통령과 함께 ‘피플 파워’ 운동의 전면에 섰던 하이메 신 추기경도 퇴진을 촉구하고 나섰으며 야당인 리카스―NUCD는 18일 탄핵안을 제출했다. 아로요 부통령은 25일 사임을 요구했다.
▽영업권 분쟁(?)〓에스트라다 대통령의 30년 지기인 싱손 주지사가 수뢰 사실을 폭로한 것은 ‘영업권 분쟁’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싱손 주지사는 ‘후에텡의 왕’으로 불리는 필리핀 도박업계의 대부다. ‘후에텡’은 특정한 숫자를 써넣은 칩을 항아리에서 꺼내 맞히면 배당금을 주는 도박으로 필리핀 국민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9월 후에텡과 비슷한 방식의 도박인 ‘빙고 투―볼(Bingo Two―Ball)’이라는 도박을 허가하면서 에스트라다와 싱손의 30년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정부 소유의 카지노 운영업체이자 ‘빙고 투―볼’ 영업증을 교부하는 ‘필리핀 어뮤즈먼트 & 게이밍’사의 고문에 싱손 주지사의 정적인 찰리 앙을 임명했다. 싱손 주지사가 11일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애칭인 ‘에랍’이 적혀 있는 상납장부를 공개한 것은 결국 이같은 ‘영업권 침해’를 참다못해 휘두른 복수의 칼이란 것이다.
▽전망〓야당이 제출한 탄핵안은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당이 절대 다수의석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 하원 재적의원 218명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탄핵을 지지해야 하는데 탄핵안에 서명한 야당 의원은 41명 뿐. 또 상원에서는 3분의 2 이상이 탄핵안을 지지해야 하는데 24석 중 여당이 18석을 장악하고 있다.
▼페소화 연일 사상 최저치▼
심각한 문제는 탄핵안 통과 여부보다 계속된 정정 불안으로 경제가 파탄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필리핀 페소화의 가치는 26일 달러당 50페소를 넘어 50.30을 기록했다. 주가도 지난달부터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정부예산은 올들어 9월까지 830억페소(약 17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무디스가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한 것은 더욱 경제상황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경제파탄의 주범’이란 인식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어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이 위태롭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