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영광.’
12일 연방 대법원의 판결로 사실상 미국의 43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없다. 지난달 7일 대통령 선거 후 5주간 ‘지상 최고의 권력’을 놓고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벌여온 장기간의 법정 다툼 과정에서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국론이 전례 없이 분명하게 갈라져 당장 이를 치유해야 하는 불똥이 발등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일반 유권자들은 물론 사법부와 언론마저 공화 민주당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철저하게 양분된 채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는 상황은 일찍이 미국 역사에 없던 초유의 혼란이다. 12일 연방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 의견을 냈던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이 “이번 대선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을 수 있지만 패자는 명확하다”며 “그것은 공정한 법의 수호자로서 법관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의 신뢰”라고 말한 것은 미국이 처한 위기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천신만고 끝에 법정 다툼에선 승리했지만 부시 후보 자신도 정통성을 둘러싼 시비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게 됐다. 고어 후보의 지지자들은 그가 전국 득표에선 30여만표를 부시 후보에게 앞서고도 공화당 성향이 강한 플로리다주 정부와 연방 대법원 때문에 플로리다주의 수작업 재검표를 못하게 돼 패배했다고 아쉬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락을 가른 플로리다주에서 부시 후보와 고어 후보의 표차가 전체 580만여표 중 200표가 안되는데다 부시 후보의 손을 든 연방대법원의 판결도 대법관 9명 중 5 대 4로 1표 차에 불과했기 때문에 고어 진영에선 쉽사리 패배를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미리 예견했기 때문이었을까. 부시 후보는 대선 유세 과정에서 줄곧 “나는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divider)이 아니라 단합을 이루는 사람(uniter)”이라고 주장해 왔다. 워싱턴 연방의회에서의 고질적인 당파 싸움을 극복, 여야가 협력하는 상생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 그의 공약이었다. 이제 그는 유권자들에게 밝힌 그 같은 약속을 반드시 실천해야만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부시 후보 진영이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를 축소키로 하고, 차기 행정부에 가급적 민주당 인사들을 여러 명 포함시키는 ‘탕평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도 고어 후보 지지자들의 패배감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다.
▼정권인수 작업 큰 차질▼
부시 후보가 미국민에게 밝힐 ‘승리 선언’도 선거 및 개표과정에서의 앙금을 깨끗이 씻고 단합을 촉구하는 내용에 무게를 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같은 일이 쉬운 과제는 아니다. 미국 언론은 “이번 대선에서 미국인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몇 년 이상의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내년 1월 시작되는 그의 4년 임기 내내 대선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후유증이 계속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부시 후보는 이 밖에도 적지 않은 난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 차기 대통령 확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정권인수 작업에 적지 않은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대선 승자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부시 후보에게 정권인수자금 제공을 거부해온 연방 총무처가 곧 530만달러의 정권인수자금과 사무실을 내준다고 해도 정권교체에 따른 ‘적대적 정권인수’를 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취임 때까지의 남은 시간이 상당히 촉박한 편이다.
▼경제연착륙도 장담못해▼
또 지난 8년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 행정부 아래서 사상 최장기 호황을 구가해온 미국 경제가 점차 하강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 미국 경제가 연착륙할 것인가, 아니면 경착륙할 것인가가 큰 현안이 된 것도 그에게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부시 후보는 대선 공약을 통해 대규모 감세를 다짐했지만 경제 여건이 악화되고 정쟁 격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선 이를 실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등 중동사태를 해결하고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지배체제에 중국 러시아 등이 반기를 들려는 상황에서 국제적인 지도력을 확보해야 하는 외교적 과제 또한 만만치 않다.
새 미국 대통령의 능력을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