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교수의 멕시코 리포트]제2의 혁명 꿈꾼다

  • 입력 2000년 12월 27일 18시 45분


《71년 만에 ‘선거혁명’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멕시코, ‘도망자’ 후지모리 대통령의 몰락으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페루.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UCLA에서 교환교수로 근무하면서 본지에 칼럼 ‘LA 리포트’를 쓰고 있는 서강대 손호철 교수(정치학)가 최근 이들 두 나라를 찾아 ‘격변의 현장’을 둘러봤다. 손교수의 멕시코와 페루 르포를 2회에 걸쳐 싣는다.》

해발 2500m인 멕시코시티를 벗어나 남쪽의 평지로 향하다 보면 몰레로 지방이 나타난다. 날씨가 무더워 스페인 영주들이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지역이다. 멕시코를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곳에 무려 2만4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초대형 하시엔다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에 대한 착취 역시 혹독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 지역은 러시아혁명과 함께 20세기 혁명의 서막을 연 멕시코혁명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다. 영화 ‘자파타’에서 말론 브랜도가 열연한 전설적인 멕시코 농민혁명의 영웅 자파타가 활약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코르테스의 옛 궁전이 있는 쿠에르나바카에 들어서자 말을 달리며 칼을 빼든 자파타의 웅장한 동상이 필자를 맞았다.

멕시코가 자신들의 20세기를 자파타로 상징되는 농민혁명으로 서막을 열었다면 이제 멕시코는 또 다른 혁명으로 21세기의 막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혁명은 1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근 1세기 전의 처절한 유혈의 내전이 아니라 투표지라는 ‘종이 총탄’에 의한 무혈혁명이다. 12월1일 보수 야당인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멕시코혁명의 후유증이 진화되고 형식적으로나마 근대적 정치의 틀이 잡힌 1929년 이후 무려 71년 만에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멕시코는 혁명 후 그 성과를 제도화하기 위해 농지개혁, 노동자들의 권익 확대, 민족주의적 산업정책 등 개혁적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1929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난 71년간 멕시코를 지배해온 제도혁명당(PRI)이다. 멕시코는 제도혁명당의 통치 아래 국내적으로 개혁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한편 미국과 영국의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등 민족주의적 정책을 펴 나갔다. 그 결과 빠른 경제성장, 상대적으로 공정한 분배,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모범국으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이 계속되면서 부패의 제도화 등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6년 단임제에 따라 제도혁명당 후보들간에는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사실상의 일당 독재하에서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제왕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엄청난 부정축재를 했다. 뿐만 아니라 경찰 관료 등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로 부패가 만연했고 제도혁명당은 노조 농민 등 사회 각계에 대해서도 이들 지도부에 특혜를 주고 충성을 강요하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주고 받기식 거래에 의해 사회전체를 부패의 연쇄 고리로 몰고 갔다. 게다가 국가주도 경제에 따른 정경유착과 폐쇄적 경제정책의 부작용으로 경제위기가 일상화됐다. 그 결과가 1982년의 외채위기와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의 선언이다.

이후 멕시코는 미국시장과의 완전통합을 의미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가입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과 개방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경제위기를 가속화함으로써 1994년 말 또 한 차례의 외채위기를 초래했다. 게다가 NAFTA의 주역인 카를로스 살리나스 전 대통령의 정적 암살 혐의, 대형 부정부패 의혹까지 겹쳐 제도혁명당은 몰락의 길을 재촉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번 정권교체로 나타났다.

결국 1982년 외채위기가 ‘멕시코 모델’ 중 경제모델의 몰락을 의미한다면 이번 정권교체는 나머지 반쪽인 정치모델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박정희 모델이라는 ‘한국 모델’ 중 정치모델이 1987년 민주화에 의해 먼저 붕괴하고 경제모델은 1997년 외환위기에 의해 나중에 붕괴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멕시코는 정반대의 순서를 밟고 있는 셈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반응은 양면적이다. 우선 정권교체 자체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특히 폭스 대통령이 인권운동가를 인권관련책임자로 앉히고 1968년 멕시코올림픽 당시 근 1000명에 달하는 시위 학생을 학살한 사건 등 과거 인권탄압에 대한 진상규명을 지시한 것에 대해 크게 고무돼 있다. 무엇보다도 멕시코 국민이 숙명처럼 받아들인 제도혁명당의 멍에에서 벗어나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발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살리나스 전 대통령이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민영화를 강행하고 그 과정에서 특정 업체에 특혜를 줘 더 큰 부정을 저지른 예를 상기시키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설사 폭스 대통령이 개혁을 하려고 해도 의회와 지방정부에서 소수 세력에 불과하고 보수적인 시장주의자인 그가 과반수 확보에 필요한 좌파 민주혁명당(의석수 18%)의 협력을 얻어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였다. 게다가 제도혁명당이 지난 70년 동안 사회 각 분야에 만들어 놓은 뿌리깊은 코포라티즘의 저항을 이겨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회 경제적 문제다. 물론 멕시코가 20%대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등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것은 사실이다. 한인들의 경우도 최근 아르헨티나 페루 파라과이 등 남미에서 멕시코로 재이민을 와 1000명대에 불과하던 한인교민이 1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같은 상대적인 경제호황의 대가는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경제 지배와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다. 예를 들어 1999년 현재 멕시코는 인구의 절반이 절대빈곤층이며 이는 개방 전에 비해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멕시코시티 도처에서 부닥치는 걸인들을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폭스 대통령은 심각한 빈부격차 해결을 주요 국정목표로 제시하고 있으나 현지 지식인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즉 코카콜라 중역 출신의 그는 빈부해소와는 거리가 먼 시장주의자로서 주요 경제 각료들을 기업인들로 채웠을 뿐만 아니라 NAFTA를 넘어서 북미공동시장(NACM)의 설립을 주장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설사 그가 빈부해소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예산도 없고 지금과 같은 개방정책과 시장주의를 고수하는 한 빈부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자파타의 동상을 보며 제도혁명당의 비극으로 끝난 20세기 멕시코혁명에 이어 이번 21세기 멕시코 선거혁명 역시 또 한 차례의 배반된 혁명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치아파스 자파시스타 농민반군▼

“새로운 악몽이 다시 찾아오는 것인지, 아니면 드디어 여명이 밝아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멕시코의, 아니 세계 좌파들의 새로운 전설이 된 자파시스타 농민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71년만의 정권교체에 대해 이처럼 논평했다.

세계가 소련 및 동유럽의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로 평정이 되고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해 선진국의 꿈에 부풀어있던 1994년 자파시스타 농민군은 밀림인 남부지역의 치아파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오랜 기간 소외된 집단인 멕시코의 인디오들은 남부지역에 모여 살면서 수백년 동안 지켜온 옥수수 생산과 같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온 이들은 멕시코가 NAFTA를 체결하면서 주식인 옥수수시장을 개방하자 마르코스의 표현대로 ‘사망선고’를 받고 만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농민봉기였다.

이후 농민군은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밀림지역으로 후퇴하고 말았지만 남부지역의 농민문제는 아직도 심각한 ‘멕시코의 화약고’로 남아 있다. 마르코스는 산간벽지에서 인터넷을 통해 주옥같은 글을 세계에 써 보냄으로써 21세기 정보시대의 새로운 혁명가로 인기를 끌고 있다. 멕시코의 주요 관광지를 가보면 검은 스키 마스크로 복면을 하고 별이 달린 전투모를 쓴 마르코스의 사진이 인기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비센테 폭스대통령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취임 연설에서 “이제 멕시코와 치아파스에 새로운 여명이 열렸다”며 마르코스의 논평에 응답했다. 또 치아파스지역의 도로봉쇄를 해제하고 군을 철수시켰으며 인디오의 자치권 확대 등을 보장하는 개헌을 약속했다. 이에 마르코스 역시 직접 의회에 출두, 개헌의 필요성을 설명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의회의 소수파인 폭스 대통령이 개헌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을지 미지수다. 또 NAFTA 등 멕시코가 처해 있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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