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 만난 한 페루 교수는 일본에서 전격 사임 선언을 하고 그곳에 주저앉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자 후지티보는 영어 ‘퓨저티브(fug―itive)’에 해당되는 ‘도망자’라는 뜻의 스페인어이며 페루 지식인들은 그를 후지모리가 아니라 발음이 비슷한 후지티보로 부른다고 설명했다.
▼비겁한 도망자로 불려▼
16세기만 해도 남미에 거대한 왕국을 형성했던 잉카의 중심지 페루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많은 제3세계 국가들처럼 독립을 성취하기는 했지만 줄곧 경제적 낙후와 군사독재에 시달려야 했다. 빈곤과 독재는 결국 80년대 좌파 정권의 집권과 무장게릴라전으로 이어졌다. 좌파 정권이 집권하자 페루는 국제금융계에서 소외되고 인플레이션으로 연간 1만%까지 물가가 치솟았다.
또 마오쩌둥(毛澤東)주의자들인 농촌게릴라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는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지지를 잃었다.
우파와 좌파 모두가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일본계 2세로 농대 학장에 불과하던 후지모리는 ‘정직과 근면’이라는 참신한 구호를 내걸고 나서 9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특히 백인이 지배하는 페루에서 동양계 정치인이라는 후지모리의 ‘장점’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디오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취임 후 선거공약과 달리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해온 초강경 긴축정책과 게릴라 진압작전을 펴나갔다. 그 결과 물가상승률을 20% 아래로 잡고 게릴라 역시 대부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남미정치인으로는 드물게 산간벽지까지 헬기로 날아가 서민을 만나고 현장을 지휘했던 그는 96년 게릴라들의 일본대사관 점거사태를 직접 지휘해 진압함으로써 ‘철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유신과 같은 친위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하고 개헌을 해 연임의 길을 여는가 하면 정보기관을 통해 공작통치를 펼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남미의 박정희’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장기집권의 야욕은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3선 금지조항을 어기고 올해 3선에 출마했지만 장기집권과 공작정치의 폐해, IMF식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인구의 70%가 빈곤층으로 추락한 사회적 양극화는 그의 당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는 부정선거를 통해 야당 후보의 과반수 획득을 저지함으로써 결선투표를 이끌어냈고 야당이 참여를 거부한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의 당인 페루2000이 의회선거에서 죽을 쑤자 심복인 정보부장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야당의원을 끌어오기 위해 매수를 시도했으며 이것이 비디오로 찍혀 공개됨으로써 그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특히 미국 정보기관의 지지를 받던 몬테시노스가 반군과 마약상들에게 러시아제 무기를 팔아 치부해온 것이 드러나면서 미국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했다. 게다가 현재 상원의원이자 몇 년 전 이혼한 전 부인이 그가 일본에 1800만달러를 빼돌려 놓았다고 폭로해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후지모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가 일본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장기집권 야욕 파멸 자초▼
이를 바라보는 페루 국민의 반응은 분노와 충격 그 자체다. 후지모리를 ‘후지티보’로 부르기를 고집하는 한 페루 교수의 반응이 대표적인 예다.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부터 안데스 산간벽지에 이르는 곳곳에 지난 대선 때 페인트로 써 놓은 ‘후지모리를 대통령에’ ‘페루 2000’이라는 구호들이 남아 있었는데 거의 예외 없이 그 위에 검은 페인트로 가위표를 쳐놓거나 ‘NO’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페루의 정치 1번지이자 ‘페루의 명동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리마 중심가의 산마르틴 광장도 예외는 아니다. ‘남미 해방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남미 독립에 앞장서 페루를 해방시켰던 호세 드 산 마르틴을 기념하는 이 광장에는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후지모리의 페루 송환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물론 후지모리의 지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페루에서 만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후지모리의 지지자라고 밝히면서 인플레를 잡아 경제를 살리고 무장게릴라를 소탕해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 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자들일수록 그의 갑작스러운 해외도주에 실망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그동안 후지모리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철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당혹감은 더욱 큰 것 같다.
▼딸도 일본 망명계획 몰라▼
사실 후지모리는 해외도주시 이혼 후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해 온 딸에게까지 망명계획을 알리지 않고 혼자 뺑소니를 치는 비겁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게다가 일본망명과 관련해 그가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이중국적자로서 망명이 필요 없는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걱정했던 군이 새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중립을 선언한 것이다. 몬테시노스는 ‘비디오사건’ 뒤 해외로 망명을 갔다가 다시 밀입국했으나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시 국외로 탈출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발렌틴 파냐과 국회의장은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후지모리의 비리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몬테시노스 계열인 군장성 12명을 전역시켰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군부는 군의 중립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인디오들 비참한 생활▼
페루 민주주의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심각한 것은 사회경제적 문제다. 악명 높은 리마의 판자촌과 안데스지역 인디오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빈곤, 특히 후지모리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의 부작용은 그동안 철권통치에 의해 억눌려 왔지만 이제 민주화의 열린 공간에서 폭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리마에서는 통신노동자들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서고 쿠스코에서도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돼 주민들은 물론 관광객들이 고통을 당했다. 지금 페루는 ‘남미의 박정희’라는 유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통스러운 걸음을 내딛고 있다.
▼'후지모리 도피' 파장-우호적 페루인 동양인에 등돌려▼
인구 2400만명의 페루는 인디오들을 말살하고 백인이 이주한 칠레나 아르헨티나와 달리 인디오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게다가 인디오들이 고산지대인 안데스 내륙지방에 거주하고 스페인인들은 본국과 교역이 용이한 해안사막지역에 리마를 건설해 여기에 주로 거주함으로써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의 비율 역시 멕시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즉 인디오가 인구의 47%이고 메스티소 37%, 백인 12%, 흑인과 아시아계가 3%를 차지한다.
아시아계의 경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인 이민자가 대거 진출해 리마에는 거대한 중국커뮤니티가 형성돼 있고 안데스 오지에서도 중국음식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역시 페루에 많은 이민을 보내 일본계 2세인 후지모리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인의 경우 뒤늦게 남미 이민의 일환으로 페루에 진출해 한때 1만5000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라틴아메리카 전반의 경제위기 이후 많은 교민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멕시코 등으로 떠나 현재는 700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주목할 것은 후지모리가 다수 인디오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데서 알 수 있듯 페루인들은 칠레나 아르헨티나에 비해 동양인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후지모리가 지방을 순찰하면 많은 주민들이 나와 ‘치노’를 연호했다고 한다.
치노란 중국인을 지칭하는 스페인어이지만 동양인을 나라별로 구별하지 않는 이들에게 치노는 동양인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이 말을 비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매우 우호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후지모리 사태’로 인해 이같은 우호적인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페루 최고의 관광지인 마추픽추의 한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다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지 않고 나오자 뒤에서 “치노,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는 욕을 스페인어로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시냇물 전체를 흐리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