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은 이날 취임사의 모두(冒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신념을 상기시킨 뒤 이 같은 이상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안고 있는 당면 문제들을 지적했다.
그는 “국민 중 다수가 번영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조국의 약속과 심지어 정의(正義)를 의심하고 있다”며 “쇠락하고 있는 학교와 감춰진 편견, 출생환경으로 인해 일부 미국인들의 야망은 제약받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어 “때론 우리들의 차이가 너무 커서 우리는 한 대륙을 공유하고 있지만 국가를 공유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의 단결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도자와 국민이 이룬 것인 만큼 나는 정의와 기회의 단일 국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적 이념을 거론하며 분열상을 시인한 것은 실제로는 지난해 11월 치러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심각히 갈라진 국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부시 대통령의 경쟁자였던 앨 고어 전 부통령이 전체 투표수에선 53만여표를 더 얻었고, 그의 당선은 플로리다주의 개표문제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가능했던 만큼 그로선 선거결과에 실망한 절반의 미국인들을 포용하는 게 무엇보다 큰 과제인 셈이다.
부시 대통령이 ‘책임 있는 시민정신’을 유난히 역설한 것도 선거 후유증을 떨치기 위해 그가 추진할 국민통합에 국민이 호응해 줄 것을 촉구한 것으로 분석된다.
부시 대통령은 정권 출범의 이 같은 태생적 취약성 때문에 취임사에서 단결을 호소하는 것 이상으로 국정운영의 부푼 청사진을 펼쳐보이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국민에게 ‘공동선’의 추구를 당부하며 “공격받기 쉬운 필수적 개혁을 방어해 달라”고 말한 것은 그 역시 현상을 넘어서는 개혁의 꿈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이를 강력히 요구하지는 못함을 시사한 대목이다.
이 같은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는 다른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와 비교하면 다소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93년 취임사에서 빈부격차의 확대, 재정적자, 범죄, 정치 불신 등 당시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저하되고 있던 미국의 문제점을 낱낱이 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의 희생과 동참을 요구했다.
그는 그후 세금증액 조치 등을 실행에 옮겨 결국 사상 최대의 재정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키고 최장기 경제 번영을 이룩했다. 그는 97년 두 번째 임기의 취임사에선 21세기의 정보화시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주문했었다.
89년 취임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당시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에 고무돼 “전체주의의 시대는 지나고 자유의 세계가 열렸다”며 강한 자신감을 표명했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81년 취임사에서 “수십년간 지속된 경제적 고통이 단시일 내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며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취임사는 집권 당시의 현실에 대한 대통령의 상황 인식과 국정 운영에 대한 소신 및 정책을 담기 마련이다.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는 미래에 대한 구상보다는 현실 문제의 해결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