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환전소에 들어가 “1000달러를 사고 싶다. 환율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3.84링기트에 팔고 있지만 달러가 없다”고 대답했다. 최근 정부가 링기트화를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달러를 찾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고 환전상은 설명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 때 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거부한 뒤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는 등 경제적으로 독자 노선을 걸어왔다.
특히 해외투기성 자본의 유입을 막고 민간 소비 촉진과 투자 확대 등에 주력한 결과 연간 8∼9%의 탄탄한 경제성장을 이뤄 독자 노선에 대한 평가는 좋았다. 그러나 올들어 아시아권의 통화 약세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일본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통화 가치가 폭락한 반면 링기트화는 고정환율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돼 수출 경쟁력이 악화되고 있는 것.
여기에 기업 구조조정의 지연과 재정적자 확대로 자본도피 현상은 더 뚜렷해졌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9.4%에서 올해 25%선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반면 1년 전 330억달러를 넘어섰던 외환보유고는 272억달러로 떨어졌다.
외환 전문가들은 “아시아 국가들과 가격경쟁을 하기 위해선 환율을 달러당 3.8링기트에서 4.2링기트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링기트화 평가절하는 말레이시아 금융시장에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링기트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물가가 올라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달러 표시 대외부채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란 것. 다임 자이누딘 재무장관은 “고정환율제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어차피 미국경제가 나빠지고 있어 수출이 어려운 상황인데 일시적인 수출회복을 위해 환율을 조정하며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제티 아지즈 중앙은행 총재도 “환율을 변경하면 투자자들이나 수출입 기업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금융 수출시장이 더욱 불안해진다”고 주장했다.
수출이 GDP의 57%나 차지하는 말레이시아가 수출 경쟁력 약화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고정환율제를 고수한 채 경제 성장을 이루며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콸라룸푸르〓이영이기자>yes20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