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태 현장]시위대-경찰 15년만에 대통령궁 대치

  • 입력 2001년 5월 1일 18시 34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 전 대통령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1일 유혈폭동으로 격화됐다. 그러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체포되고 경찰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면서 사태가 다소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CNN방송과의 전화회견에서 “폭동사태가 정상화되고 있다”면서 “폭동을 주모한 인사들은 법에 따라 엄중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1일 새벽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화염병과 사제 총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상점과 차량 등에 불을 지르고 인근 건물의 유리창과 신호등을 부수는 등 거리는 한때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했다.

에스트라다 지지자 2만여명은 이날 새벽 아로요 대통령의 퇴임을 요구하며 아로요 대통령이 거주하는 말라카냥궁까지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가 말라카냥궁 부근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1986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축출한 ‘제1차 시민혁명’ 이후 15년만의 일이다.

이날 오전 2시경 대통령궁에서 10㎞ 떨어진 한 가톨릭 성당에서 행진을 시작한 시위대는 4시경 대통령궁 진입로에 도착했다. 시위대는 트럭 등을 동원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말라카냥궁에서 1㎞ 떨어진 군초소를 파괴했다.

군경 합동진압대는 경고 사격과 최루탄을 쏘아 간신히 시위대를 해산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2명과 시위대 2명이 사망하고 138명이 부상했으며 103명이 체포됐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정권전복 기도’라고 규정하고 마닐라 일원에 ‘폭동 사태’를 선포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또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건강 진단을 위해 입원한 병원에 대통령직 복귀를 발표하는 선언문 초안을 남겨뒀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로요 대통령은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계엄령을 선포할 생각은 없다”면서 “사태가 완전 정상화되는 즉시 ‘폭동사태’ 조치를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레이날도 베로야 전 경찰총장 등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측근 11명을 배후세력으로 지목, 체포령을 내린데 이어 후안 폰체 엔릴 상원의원을 자택에서 체포했다. 수배령이 내려진 빅토르 바탁 경찰국장과 마르셀리노 말라야칸 여단장은 자수했다. 법무부는 “엔릴 의원이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반란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고 밝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핵심 지지세력을 와해시키겠다는 방침을 시사했다.

▼유혈소요 왜 일어났나▼

이번 시위는 빈민 출신에다 인기 영화배우로 국민의 인기를 누리던 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이 지난달 25일 부패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곤층인 에스트라다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대변자로 믿어왔던 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이 수감되자 그동안 쌓여온 분노를 폭발시킨 것.

당초 평화적이던 시위가 시간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14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구세력이 아로요 정부를 흔들기 위해 배후에서 시위대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군부가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있는 데다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찍힌 에스트라다의 복귀 운동은 명분이 없기 때문에 이번 사태가 정권의 전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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