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공산정권 대량학살' 단죄 착수

  • 입력 2001년 5월 16일 18시 33분


폴란드 공산 정권 최후의 지도자였던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전 공산당 서기장을 단죄하기 위한 역사적인 재판이 15일 바르샤바 지방법원에서 열렸다.

폴란드 사법부는 야루젤스키 전 서기장이 1970년 그단스크 등 발틱 3개 도시에서 물가고와 경제난에 항의하는 노동자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발포 명령을 내려 44명이 숨지고 1200여명이 부상한 학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그를 소환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15일 2명의 경호원을 대동한 채 시력 보호용 검은 안경을 끼고 법정에 들어서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변호사들은 “발포 명령은 야루젤스키가 아니라 시위 진압 현장의 하급 장교들이 내렸다”며 “당시 야루젤스키가 강경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구소련군이 진압을 빌미로 침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신장염과 디스크를 앓고 있는 그를 지지하는 퇴역 장성들이 이날 방청객으로 나와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야루젤스키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당시 9명의 공산당 관리들과 장성들은 건강을 이유로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번 재판은 ‘역사적 과오’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단죄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유죄가 인정돼 최고 25년형을 받을지도 모를 노쇠한 공산 정권 지도자를 실제로 감옥에 보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뉴욕타임스지 등은 지난해 10월 재집권에 성공한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이 9월 총선을 앞두고 자신이 이끌고 있는 민주좌파동맹(SLD)과 구공산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정치적인 성격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84년 야루젤스키 정권 아래서 최연소 각료로 발탁되는 등 ‘구 공산 정권의 총아’였던 그는 89년 공산 정권 붕괴 후 재빨리 변신해 90년 SLD를 결성했다. ‘세련된 테크노크라트’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데 성공해 ‘거친 저항 세력 지도자’로서의 한계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을 95년 대선에서 누르고 집권했다.

그러나 아직 폴란드 하원(460석)은 바웬사가 주도한 자유노조선거운동(AWS)이 최다 의석(186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총리 역시 AWS가 배출하고 있다. 야루젤스키의 학살 주도 혐의에 대한 재판은 96년 시작됐으나 그의 건강을 이유로 중단됐으며 99년 대법원은 재판 재개를 명령했다. 크바시니에프스키 정권이 올해 총선을 앞두고 재판을 본격화한 것은 구 공산정권과의 완전 결별을 알리기 위한 신호탄이라는 분석이다.

한편 1970년 폴란드 노동자 대량 학살은 10년후 폴란드 최초의 독립 노조인 솔리다르노시치(연대)를 결성하게 만든 동인으로 작용했다. 야루젤스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 바르샤바 지방법원이 자리한 거리의 이름 또한 솔리다르노시치여서 ‘움직이는 역사의 얼굴’을 되새기게 한다고 외신이 전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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