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시절 미 의원들이 한국의 민주주의 및 인권, 언론 탄압 상황 등에 관해 한국의 대통령과 정부에 해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일은 종종 있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과거에 비해 훨씬 진척된 지금 한국의 언론 상황을 다수의 미 의원들이 주목하게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이번에 서한을 보낸 의원 8명 중 7명이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고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중진인 벤저민 길먼, 다나 로라배커, 크리스토퍼 스미스 의원 등이 포함돼 있어 한국 정부로서는 이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해명을 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서한은 김 대통령에게 우편으로 전달됐으며 팩스로 주미 한국대사관과 워싱턴 주재 한국특파원들에게도 보내졌다.
8명의 미국 의원이 김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낸 것은 그의 언론 개혁 촉구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언론사 세무조사와 이로 인한 언론자유 제약 논란 등이 단순히 한국의 국내 문제만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이 서한 말미에서 “노벨상 수상자인 김대통령이 자유로운 표현은 자유로운 국민의 초석이라는 사실을 한국 관리들에게 강조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김대통령에겐 뼈아픈 지적일 수 있다. 이는 뒤집어보면 평생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 등으로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 대통령에게 자신이 이끄는 정부 관리들에게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언론 짓밟기’란 기사에서 김 대통령의 언론관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보도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로라배커 의원과 스미스 의원은 세무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인 3월에도 김 대통령에게 한국의 언론자유에 대한 견해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는 등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번 서한 발송을 주도한 로라배커 의원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터’지의 논설위원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이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16일 “이번에 서한을 보낸 의원들은 대부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구 출신이라서 한국 언론문제를 거론한 것 같다”고 말했으나 오렌지 카운티 한인회의 한 간부는 “로라배커 의원은 평소 한인 행사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고 한인사회와 교류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번 서한 발송의 파장이 어느 정도가 될지는 예단키 어렵다. 그러나 미 의회가 한국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면서 현재 진행중인 검찰의 언론사 관계자 수사 등 한국내 상황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것은 분명하다. 경우에 따라선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등에서 공식적으로 한국 언론 상황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3월 김 대통령에게 보낸 로라배커 의원 등의 서한에 대해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서한전문▼
친애하는 김대통령님.
우리는 남한의 활기찬 민주화 과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독립 언론 및 언론인에 대한 정부의 압력을 전하는 계속적인 보도에 우려를 표명하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한국 언론은 특별세무조사가 몇몇 독립 신문 및 언론인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도해왔습니다.
6월 5일 한나라당 대변인은 “정부가 한 언론사의 사주가 구속될 것이라는 루머로 언론사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게다가 전직 장관인 노무현씨와 대통령의 집권여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언론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촉구했습니다.노씨는 나중에 대통령께서 그의 발언을 치하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선거가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필수불가결한 언론자유가 억압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합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공개적으로 언론개혁을 촉구한지 몇 주만에 국세청이 서울에 근거를 두고 있는 23개 언론사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17개 신문사와 5개 방송사, 그리고 연합뉴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400명의 조사요원 가운데 과반수가 이른바 한국언론의 빅3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를 조사했다고 보도됐습니다. 게다가 3월에는 지방국세청 관리들이 150개 이상의 신문 배달지국을 급습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우리는 또한 한국신문협회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린 결정을 비난한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정부가 독립 언론사에 개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이유로 2년 전 폐지됐던 규제들(신문고시를 말함)을 부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유권자들 사이에 집권당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면서 정부 소유 신문 및 매체들이 벌이는 캠페인은 독립 언론사를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활발하고 활기찬 인쇄 및 전자매체의 지속을제한하려는 귀하 정부의 관리들에게 자유로운 표현은 자유로운 국민의 초석임을 강조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