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渡美 발표 배경]와히드 망명인가…명분쌓기 인가

  • 입력 2001년 7월 25일 18시 29분


압두라만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61)의 갑작스러운 미국행은 사실상의 망명인가, 아니면 측근의 말대로 신병 치료를 위한 것인가.

국민협의회(MPR)의 탄핵으로 대통령직에서 밀려난 뒤에도 대통령궁을 고수하던 와히드 전 대통령이 26일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날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와히드 전 대통령의 주치의는 25일 “시력을 거의 상실한 와히드 대통령이 최근의 충격으로 고혈압과 당뇨병 뇌졸중이 재발할 징후가 있어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검진을 받을 예정”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와히드 전 대통령은 사실 나이에 비해 건강이 아주 나쁜 편이다. 시력을 거의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고혈압 등으로 건강이 악화돼 이동할 때도 꼭 측근의 부축을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와히드 전 대통령이 신병 치료를 핑계로 사실상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대통령 자리에서 밀려나기는 했으나 국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부패 스캔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대통령에서 밀려난 뒤 구속된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 전 대통령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와히드 전 대통령의 측근은 “그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는 ‘자유인권재단’을 자카르타에 설립할 준비를 마치고 난 다음일 것”이라고 말해 상당기간 미국에 체류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미국 체류가 치료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와히드 전 대통령은 25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는 메가와티 정권 하에서 사실상 군부통치 시절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며 메가와티 신임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또 26일 대통령궁을 떠날 때에도 메가와티 대통령측의 퇴거 요구가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 국민에게 스스로 대통령궁을 비워주는 것이 아니라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와히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지 불과 3일 만에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기까지에는 가족과 측근의 설득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가족과 측근들은 “모두가 등을 돌린 상태에서 대통령궁에 머물며 계속 버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버티면 버틸수록 국민 여론이 나빠질 것이 뻔하니 하루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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