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右로…右로 고이즈미號]"주변국 눈치 안본다" 고개세운 日

  • 입력 2001년 8월 13일 18시 27분


日 승려들'신사참배 반대'
日 승려들'신사참배 반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13일 국내외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전범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 우려하던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다시 한번 분명히 드러났다.

그가 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을 피하는 편법을 쓰기는 했으나 총리가 공개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총리 이후 16년만의 일이어서 국내외에서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이번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강행은 일본 사회의 내셔널리즘과 본인의 고집스런 정치적 신념의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우려를 자아낸다.

▼글 싣는 순서▼

- 上-국내외 반발 아랑곳 없는 야스쿠니 참배
- 中-우경화의 발판, 헌법개정과 자위대 강화
- 下-끊임없는 역사 왜곡

우선 한중일 3국 관계가 당분간 냉각될 것이 틀림없다.

한일간에는 이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와 남쿠릴열도의 꽁치잡이 문제로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다. 여기에 야스쿠니 참배가 겹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측이 자신들이 원인을 제공한 이들 현안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의 논리와 분위기만을 앞세우고 있을뿐 월드컵 공동개최국인 한국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도 교과서문제와 무역마찰, 리덩후이(李登輝)전대만총통의 일본 방문 허용 등으로 인해 삐걱거리고 있다. 중국은 특히 일본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72년 중국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배상을 포기했다. 중국은 당시 일본 국민 전체가 아니라 일부 군국주의자가 문제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일본 현직 총리가 일부 군국주의자, 즉 A급 전범 위패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이같은 국교정상화의 논거를 무너뜨린 것으로 중국은 풀이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 성격을 공식인지, 사적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참배후 기자회견에서 총리의 마음을 담아 참배했다 며 사실상 공식참배였음을 인정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 전 담화와 참배 후 기자회견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한중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다한 뒤에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그의 제안에 한국이나 중국이 선뜻 응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일본 국내에서도 계속 논란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 의원중 상당수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실현시키는 모임 을 만들어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총리가 8월 15일을 피한데 대해 실망감을 나타냈다. 이들과 우익세력은 앞으로 총리가 외압에 굴복했다 며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반면 외교문제 등을 고려해 8월 15일 참배를 단념하도록 요청했던 측근들은 이번 결정을 최선의 선택 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소수다. 무관심한 척하는 대다수 일본인도 내심 참배가 나쁠 것이야 없지 않느냐 고 생각한다.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면 할수록 고이즈미 총리의 국내기반은 더욱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부 비판은 감수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야스쿠니 참배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는데 이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겉으로는 밑지지만 안으로는 남는 장사를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도쿄=심규선특파원기자>ksshim@donga.com

▼야스쿠니신사란

1869년 메이지(明治) 천황 시절 일본군인들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도쿄(東京) 쇼콘샤(招魂社)’가 전신이다. 1879년 야스쿠니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전쟁 제2차세계대전 등에서 숨진 군인과 군속 246만6000여명의 위패가 보관돼 있다. 부지가 3만평이나 되며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의 동상, 가미카제 돌격대원의 동상,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일종의 전쟁박물관 등이 함께 있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군국주의 확대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으며 천황숭배와 군국이념을 조장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 진주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는 야스쿠니신사와 국가와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해 국영 신사라는 특권적 지위를 박탈했다.

78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제2차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合祀)되면서 총리나 각료의 참배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제의 침략을 당한 국가들은 일본 총리가 전범 위패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라며 비난하고 있으나 일본의 보수우익세력과 유족회 등은 총리의 공식참배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공식 참배하자 한국 중국이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후 총리의 공식 참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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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기자>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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