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각료회의는 경제재정자문회의가 제시한 2002회계연도 예산안 골격을 확정했다. 공공투자와 일반정책비를 10% 깎아 환경 교육 정보기술 등 7개 중점분야에 투자하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이날 저녁 예산안 작성 책임자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상은 공영방송인 NHK에 출연해 예산안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고이즈미 총리는 개혁 관련 합동회의를 마치며 특수법인 74개와 영리법인 83개 등 157개 공익법인을 폐지 또는 민영화한다는 전제 아래 근본적으로 개혁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행정개혁상에게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을 각오를 하고 분발하라”고 지시했다. 이시하라 행정개혁상은 이날 저녁 한 민간 TV방송사가 긴급 편성한 ‘샌드백의 결의’라는 타이틀을 붙인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공부문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총리가 의장 또는 본부장을 맡아 반드시 출석해야 할 회의나 간담회는 7월말 현재 34개나 된다. 모든 회의 결과는 언론매체를 통해 곧바로 국민에게 알려진다. 직후에 논란이 즉각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때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면 총리는 결정을 유보하는 게 관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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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대 총리는 이처럼 자문회의나 간담회, 추진본부 등을 만들어 정책의 골격을 결정해오고 있다. 이들 회의기구가 결론을 내려 건의한 사항은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법 제정시 또는 시행 과정에서 이 건의사항은 대부분 수용된다.
총리가 해당 부처에 직접 지시해도 될 일을 구태여 ‘옥상옥(屋上屋)’ 같은 기구나 회의를 만들어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왜일까. 이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책집행의 명분을 쌓으려는 생각에서다. 명분이 확보되면 반대 세력을 손쉽게 누를 수 있고 국민의 지지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일본 정치의 리더십 유형은 ‘사전 준비와 이견 조정의 리더십’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정치의 또 다른 힘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건전한 대립’에서 나온다. 지방분권의 역사적 전통과 50여년의 지자체 역사를 갖고 있어 중앙정부라 해도 지자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지자체도 주민의 권리나 복지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구조개혁에는 ‘자활 노력을 게을리하는 지방정부에는 보조금을 깎겠다’는 안이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고지(高知)현의 하시모토 다이지로(橋本大二郞) 지사가 즉각 정면으로 따졌다. 그는 “정치란 밸런스 감각이 중요하다. 총리는 먼저 지역실정을 파악하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 정도로 지방의 목소리가 강하다.
일본의 지방자치제는 1947년에 시작됐다.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지사와 3200여개 시정촌(市町村) 장은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 따라서 지자체가 중앙정부에 등을 돌리면 총리도 버티기 어렵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독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 국민은 ‘이중의 안전장치’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겉으로 보아 일본 국민은 행정부 동향이나 정치권에 무관심한 편이다. 이는 정부가 나름대로 리더십을 발휘해 적정 수준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대형 재해가 일어났을 때 이 같은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도쿄(東京)도에 속한 미야케지마(三宅島)에서 지난해 6월 화산활동이 활발해졌다. 주민 3400여명은 석 달 뒤 모두 섬을 떠나 현재까지 객지생활을 하고 있다. 도쿄도는 이들에게 임시주택을 제공했고 교육도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 7월 참의원선거 때는 흩어져 살고 있는 섬 주민을 위해 여러 곳에 임시 투표소를 만들었다.
이들이 언제 섬마을에 돌아갈지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불안한 객지 생활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이 불만을 품고 집단행동을 한 적은 없다. 중앙정부와 도쿄도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도쿄도는 미야케지마 피해 복구에 1000억엔 정도 들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는 이에 따라 ‘미야케지마 복구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야케지마 사건은 ‘국민을 위한 정부’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끝-
▼박철희교수-정책 결정되면 '뒤집기' 힘들어▼
대통령 중심제의 한국에서는 대통령의 결정이 절대적인지라 체제가 다른 일본에서 리더십을 배울 만한 게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역사가 오랜 일본에는 개인의 자질을 넘어선 정치적 리더십이 있다.
한국에서는 중요안건을 결정하기 위해 최고결정자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일본에는 다양한 세력이 다양한 채널로 제각기 목소리를 정책결정에 반영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각종 이익집단과 관료, 정치가 간에 의사소통 채널이 형성돼 있다. ‘장외정치’나 ‘운동장 정치’는 발붙일 수 없다.
색깔이 다른 언론매체를 통해 목소리가 표출되는 일본에서 ‘싹쓸이’나 ‘말아먹기’는 쉽지 않다. 이해관계자를 배제했다가 벌어질 ‘철저항전’을 피하기 위해 심의회 조사회 정책간담회 등을 통해 설득과 이견을 조정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이렇게 결정되고 나면 ‘깜짝쇼’나 ‘뒤집어엎기’로 결론이 바뀌는 경우는 적다.
밀어붙이기식 일 처리도 일본에서는 보기 어렵다. 총리도 각료와 여당, 행정부와의 의견조정을 통해 의사를 결정한다. 특히 예산이나 법률제정이 필요한 정치적 결정은 여당의 정책조사위원회를 통해 면밀하게 검토하고, 야당과는 국회대책위원회 등을 통해 충분히 사전에 의견을 조율한다. ‘낙하산 공천’보다 ‘지역후원회’를 기반으로 국회에 등장한 의원이 대부분인지라 의원들이 당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도 적지 않다.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 확보와 정책결정구조의 제도화라는 과제를 모두 달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론을 반영하는 리더십, 정책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리더십, 설득을 게을리하지 않는 리더십은 한국이 일본에서 배울 점이다.
(일본 국립정책연구대학원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