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마바드에 주재하는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외교관들은 이날 가족을 안전지대로 대피시켜 인접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충돌이 목전에 이르렀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더구나 이날 인도 접경도시인 펀자브주 시알코트의 한 공사장에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폭탄테러가 발생해 파키스탄을 찾은 외국 언론인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국경 도시 페샤와르에 있는 잘루자이 난민촌도 이슬라마바드와 별반 다르지 않는 분위기였다. 5개월전 기자가 이 곳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경계가 한층 더 삼엄해졌다. 난민촌을 경비하고 있는 파키스탄 방위군은 서방 기자의 출입을 일절 금했다. 이번 사태로 난민들이 격앙돼 있어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접근은 허용했지만 난민과 직접 만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난민들이 ‘왜 미국이 죄 없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려 하느냐’며 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의 공포가 확산되면서 탈레반 정권의 근거지인 칸다하르와 통하는 파키스탄의 국경마을 콰이타에는 지난주부터 국경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넌지시 알려줬다. 이 곳에 임시 캠프가 마련됐지만 식수와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 난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에 협력하겠다고 밝혔지만 아프가니스탄과 2400㎞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시작될 경우 미국은 물론 미국을 돕고 있는 자국 정부에도 항거할 것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라발핀디에서는 18일 오후 1000여명의 파키스탄 원리주의자들이 “이번 테러는 미국이 잘못해서 당한 것이지 탈레반이 저지른 것은 아니다”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면 우리도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카라치에서도 5000여명이 ‘빈 라덴은 영웅’이라고 쓴 포스터를 들고 시위를 벌였으며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는 19일 3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파키스탄 경찰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한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 결정으로 반미 테러공격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전국에 비상경계령을 발동했다.
파키스탄 언론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이미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탈레반은 2만5000명의 병력과 러시아제 스커드 미사일 등 중화기를 파키스탄령인 카이바르 관문 건너편에 집중 배치했다. 토르크햄을 비롯한 국경 주요지역에도 12.7㎜ 대공포가 배치됐다. 카불에 주둔하던 아랍 및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민병대도 파키스탄 국경을 향해 40㎞가량 남쪽으로 이동했다.
탈레반 정권이 수도 카불의 통행금지를 밤 11시∼다음날 오전 3시반에서 밤 9시반∼다음날 오전 4시반까지로 연장하는 등 주민 통제를 강화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슬라마바드-페샤와르=홍권희기자〉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