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反덤핑공세]궁지몰린 日업계 한국 '발목잡기'

  • 입력 2001년 10월 24일 18시 57분



《세계 반도체경기가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일본 업계가 한국에 대해 반(反)덤핑 공세를 펴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70, 80년대 한국에 전자관련 기술을 한 수 가르쳐줬던 일본이 새삼 한국의 덤핑 수출을 문제삼은 것은 눈앞의 생존을 위해 ‘첨단기술 원조’의 자존심을 포기한 것이라는 분석.

유례 없는 정보기술(IT) 경기침체 속에서 일본 업계가 느끼는 위기감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 日 4개 반도체업체 한국에 反덤핑 공세
- 일본 반도체업계 현황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금융 지원을 끈질기게 공격하는 데 이어 일본 업계까지 대(對) 한국 공세에 가세함에 따라 한국은 최대 교역국인 미국 일본을 상대로 버거운 ‘겹치기 통상전쟁’을 치러야 할 처지다.》

▽반도체 불황, 얼마나 심각한가〓‘마지막 남은 힘을 쏟는 독일의 인피니온테크놀로지, 미국 정부의 위세에 기대는 마이크론, 가뜩이나 비좁은 차선에 끼어들려는 중국,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대만업체.’

삼성증권 임홍빈 애널리스트는 세계 반도체 업계가 펼치는 생존게임 양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메모리부문 세계 1위인 한국의 삼성전자는 반도체부문의 실적악화에도 불구하고 업계 최고 수준의 원가 경쟁력과 정보통신 가전 등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어 사정이 가장 좋은 편.

반면 한때 세계 반도체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업체들은 한국 유럽의 메이저 업체와 대만 중국의 후발업체 사이에서 협공을 받아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사정이 나빠진 결정적인 원인은 물론 가격 폭락이다. 주력제품인 64메가D램의 시장가격은 올해 중반부터 1달러 미만으로 떨어져 원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호황과 불황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반도체 업종의 특성상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원가를 낮추거나 자금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지만 일본 업체들은 95년 이후의 호황기에 사업구조조정을 소홀히 해 원가 경쟁력이 메이저 업체 중 가장 떨어진다.

▽두 나라 업계의 감정이 변수〓상황이 어려워지자 일본의 도시바는 최근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삼성전자에 메모리부문을 인수해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도 당장 자금 여력이 넉넉하지 않은 처지여서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결국 도시바는 협상 대상을 독일의 인피니온 쪽으로 바꿨고 이 과정에서 한국측에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가격 상승을 기대해 올해 초부터 자체 감산을 시도했지만 삼성전자 등 메이저들이 동참하지 않는 바람에 의도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일본 업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반덤핑 제소를 하면 일본 정부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상대로 일본 판매가격의 적정성 등을 조사하게 되지만 두 나라 전자업계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본격 보복조치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다만 반도체 경기회복 시기가 내년 하반기 이후로 늦어져 일본 업체들이 막다른 길목에 내몰릴 경우 한일간 ‘반도체 전쟁’이 빚어질 수도 있다.

반도체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IC인사이트는 내년 세계 반도체시장의 성장률을 종전의 16%에서 1%로 낮추고, 설비투자 규모도 25%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방위 통상압력 비상〓한국이 미국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통상마찰을 빚은 것은 전례가 매우 드문 일. 특히 대상 업종이 철강 반도체에 이어 조선 자동차까지 확산될 가능성이 커 경기침체로 고전중인 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조선은 이미 유럽연합(EU)과 통상 분쟁을 빚고 있고 미국 수출이 호조를 보이는 자동차도 미국 업계의 역공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박원재·하임숙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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