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게 듣는다]이리에 아키라 美 하버드대 교수

  • 입력 2002년 1월 3일 18시 28분


미국의 9·11테러 참사 이후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 중이다. 기존의 주권국가 체제만으로는 테러 빈곤 환경 인권 등의 문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게 됐다는 자각도 생겨나고 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현실의 불평등이 증오를 낳고 증오는 무제한의 폭력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리에 아키라(入江昭)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오래 전부터 “주권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정부기구(NGO)나 시민사회간 국제연대를 통해 ‘인간의 얼굴을 한 글로벌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일본 릿쿄(立敎)대 이종원(李鍾元)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해법을 들어 보았다. 대담은 지난해 12월 14일 미일간 국제전화를 통해 진행됐다.

▽이종원 교수〓지난해 시작된 21세기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장식됐습니다. 우선 ‘9·11 테러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접근방식이 있는데,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할까요.

선생님은 ‘불안과 희망의 공존이 역사의 큰 틀’이라고 지적했는데 테러사건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불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리에 아키라 교수〓9·11 테러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문제나 북아일랜드 문제,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테러가 잇따랐지요. 길게 보면 테러사건의 배경에는 언제나 빈곤과 편견,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가 존재해왔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미국이 직접 공격을 받았고 이에 대해 국제사회가 전보다 응집력을 보였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와의 연속성이 있는 면과 새로운 면, 양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공포나 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분위기 역시 강해지고 있습니다. 테러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인류가 하나라는 의식도 더 강해졌습니다.

▽이 교수〓그러나 미국 내에서는 애국주의, 배타주의 움직임도 일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미국의 이런 움직임이 또 다른 불안요인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자유 평등 등 보편적 가치를 지켜온 세계 리더국가가 아니었습니까.

미국이 단순한 애국주의만으로는 테러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다문화 다인종 사회인 미국이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인권 자유 등의 이상을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즘 정세를 보면 조지 W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가 두드러지는 듯한 인상입니다만….

▽이리에 교수〓신문논조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90% 가까운 미국인들이 부시 정권의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확대되고 애국주의 경향이 강해졌지요. 그것은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테러집단이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감이 원인입니다. 진주만 공습 때는 상대가 일본이라는 국가였기 때문에 오히려 대응이 쉬웠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곧 ‘미국적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테러를 제압하기 위해 미국이 지켜온 전통적 가치인 인권이나 자유를 무시한다면 이는 자기부정이고 모순이지요.

각국은 테러사건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적극 협력해왔습니다. 만일 미국이 이번 사건을 군사법정에서 단독 처리한다면 모처럼 조성된 국제협력의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돼 국제여론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최근 국제사회에 대한 의식이 강해지면서 국가를 넘은 존재, 민족을 뛰어넘은, 그 저변에 깔린 인간애 같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주권국가를 토대로 한 기존의 국제관계는 변화할 것입니다. 국가를 뛰어넘는, 예를 들면 유럽연합(EU)이나 비정부기구(NGO) 등의 연대감이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 교수〓아프가니스탄전쟁 이후의 세계질서가 또 하나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 ‘국가의 세기’라는 정의도 있지만, 선생님은 ‘미국의 세기’ ‘NGO의 세기’로 정의하신 바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테러 이전부터 글로벌화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반(反)글로벌 운동은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서 보듯 폭력적인 항의운동으로 나타났지요. 또 일부에서는 반글로벌화 운동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글로벌화’ ‘글로벌화의 격차해소’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리에 교수〓20세기 전반은 주권국가가 강해진 전쟁의 반세기였지만 후반에는 세계 강국인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도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 한편 NGO나 비국가주체(NSA), 다국적 기업 등 국경을 넘은 조직이 점차 힘을 얻게 됐습니다. 테러나 마약 등도 나쁜 의미에서의 NSA라고 할 수 있지요. 또 EU와 같은 국가 간 통합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대국 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나더라도 국지전에 불과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NGO가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글로벌화는 경제 기술면에서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이를 중단시킬 수는 없겠지요. 문제는 글로벌화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전 세계가 골고루 윤택해지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엔 등의 국제기구나 NGO 등이 협력해 ‘인간의 얼굴을 한 글로벌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글로벌화는 인류가 하나가 되는 방향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이 교수〓일본정부는 이번 테러사건을 계기로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을 구실로 대(對)테러특별조치법을 제정, 전후 처음으로 자위대를 전시지역에 파병하는 등 평화헌법을 위협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일, 중일관계가 악화된 시점에서 동아시아 관계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이리에 교수〓일본이 너무 서둘러 대응했다고 봅니다.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으로 오히려 나쁜 선례만 남겼지요. 이웃나라의 감정을 무시하면서까지 국제사회에 공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향후 지역 내 협력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동아시아 지역도 세계 흐름과 마찬가지로 국가 간이 아니라 시민차원, 경제교류 등으로 협력을 추진해야 합니다. 북한이나 중국의 군사적 위협 등을 이유로 미국과 안보동맹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국가중심적 사고, 전근대적인 역사관에 집착하는 시대착오입니다. 앞으로는 테러나 환경 인권 난민문제 등 국가 단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아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공격을 당한다면 국가단위가 아닌 테러집단에 의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때 주변국 협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일본에선 요즘 ‘국익론’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참된 국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국가보다는 일본인이 인간으로서 다른 나라 사람과 어떻게 교류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러려면 안보 등 전통적인 국익보다는 상호이해 촉진, 역사관 공유 등이 필요하지요.

▽이 교수〓80년대 이후 자주 등장한 동아시아 개념이 최근 중국의 WTO 가입을 계기로 다시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아세안+3’ 회의에서 ‘동아시아공동체’를 발전시키자는 제안이 나온 것도 그런 맥락이지요. 한중일 경제의 밀접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경제협력 강화 등 동아시아가 격동기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또 테러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문명권 형성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는 우선 국가 간 충돌을 극복해야 하는 게 아직 큰 과제이지만, 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문명권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리에 교수〓유럽도 300여년에 걸친 대립과 전쟁을 통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하나로 통합됐습니다. 아시아도 지금까지 이해 부족과 대립이 있었지만 큰 방향으로는 EU처럼 국경을 낮추고 아시아 공동체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국가를 뛰어넘어 교육 등을 통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시아 각국이 지금처럼 주권국가로서의 주장만 하면 공동체는 불가능하지요.

국경을 넘어 시민사회를 통합하는 데는 NGO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과거 유럽처럼 국가 간 대립을 겪은 후 통합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시민사회의 통합을 통한 커뮤니티를 지향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는 있습니다. 물론 두 번째 방법이 바람직하지요. 각국이 협력해 대처해야 할 문제는 환경 난민 테러 등 산적해 있습니다. 국가 정부에만 맡겨서는 해결할 수 없지요.

다행히도 이미 한국과 일본 간에는 시민 차원의 연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도 확산돼 갈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만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의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나의 문명권이 성립하려면 동(東)도 서(西)도 없는 보편적 가치가 선행돼야 합니다.

▽이 교수〓동아시아, 특히 일본에서는 중국을 한때 군사적 위협으로 여겨오다가 최근 중국의 WTO가입 이후에는 경제적 위협으로 보는 시각이 강합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이리에 교수〓중국을 군사대국 경제대국 등 위협적인 존재로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중국이 WTO에 가입했다고 해서 금방 위협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중국도 시민 사회가 성숙되고 민주화가 본격화되면서 환경문제 등 국제 공통문제에 관심이 높아질 것입니다. 또 중국의 경제적 약진도 주변국들은 반가워해야 할 것이 아닌가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아시아 주변국은 물론 전 세계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인가를 논의해야지요.

정리〓이영이도쿄특파원 yes202@donga.com

▼이리에 아키라(入江昭)는 누구인가▼

1934년 일본에서 태어난 이리에 아키라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정통한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 최근에는 미일 양국의 편협한 국가주의적 시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 활발한 사회적 발언으로 폭넓은 신뢰도를 얻고 있다.

53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대, 시카고대를 거쳐 1989년부터 모교인 하버드대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군사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이념이나 시대정신 등 사상적 측면도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요소라는데 주목, 이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연구작업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88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시민사회 NGO 등의 교류와 접촉을 강조한 저작활동으로 미국 역사학계를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미일관계 50년’ ‘태평양전쟁의 기원’ ‘평화적 발전주의와 일본’ ‘정치권력을 넘어서’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중일관계 100년’ 등 다수.

▼이종원 교수 약력▼

▽1953년 대구 출생

▽서울대 공과대 중퇴

▽1982년 도일. 국제기독교대, 도쿄(東京)대 국제정치학 박사

▽도호쿠(東北)대 법학부 조교수 거쳐 1996년부터 릿쿄(立敎)대 법학부 교수

▽미국 프린스턴대 객원교수 역임

▽아사히신문 아시아네트워크 객원연구원

▽저서 ‘동아시아 냉전과 한미일 관계’로 99년 아시아인으로 처음 미국역사가협의회(OAH) 최우수 외국어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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