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유럽연합(EU)이 단일 화폐인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미국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올해 안에 남미까지 확대할 계획을 발표, 세계경제의 블록화는 어느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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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다급… “中급부상 亞경제 패권 뺏길라” ▼
동아시아 경제협력체 구성을 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행보가 숨가쁘다.
그는 9일부터 7일간 동남아시아 5개국을 순방하면서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의 관계를 ‘솔직한 동반자로서 함께 걷고 함께 발전하는 관계’임을 강조했다. 이 같은 ‘신(新)아시아 외교전략’은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고 아시아 맹주로서의 위치를 굳히기 위한 것.
그는 9일 첫 방문국인 필리핀에 도착한 후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일-아세안간 포괄적 경제제휴 협정 구상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무역관세를 완전 철폐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포함해 투자나 과학 기술 교육 관광 등 폭넓은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자는 것. 일본은 13일 체결하는 싱가포르와의 FTA를 토대로 전문가 논의를 거쳐 나머지 아세안 국가들과도 정상회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로 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와 함께 2003년을 ‘일-ASEAN 교류 원년’으로 정하고 ‘ASEAN+한중일’이 동아시아 지역개발을 논의하는 ‘동아시아 개발 이니셔티브’의 개최도 아울러 제안했다. 그는 이날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장래 동아시아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길 바란다”며 일본이 공동체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일본의 이 같은 외교전략은 아시아보다 미국을 중시해온 기존 전략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
지난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전후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고 있기 때문. 일본은 80년대부터 1만여개가 넘는 기업이 아세안에 진출해 사실상 아시아 지역경제의 맹주로 군림해 왔으나 중국의 부상과 함께 영향력 약화를 체감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 중국이 10년 이내에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로 하자 일본 내에서는 아세안과의 경제협력에서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에 제창한 포괄적 경제제휴협정도 합의시한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국보다는 먼저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목표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한국 야망…“中-日 신경전 틈새노려 주도권”▼
한국은 독자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지역 맹주를 꿈꾸는 중국과 일본이 서로에게 주도권을 양보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두 나라 역시 블럭화되고 있는 세계경제의 추세를 의식해 동아시아 단일 경제권의 창출을 희망하고 있을 거라는 점. 따라서 양자의 경쟁관계를 조율하면서 동아시아 단일 경제권을 형성할 주체가 한국이 될 수 있다는 복안이다.
정부의 구상이 가시화된 것은 지난해 10월말 브루나이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중일 정상회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주제발표에서 이 회의를 ‘동아시아 정상회의’로 전환하고,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EAFTA)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유럽연합(EU)의 역내 교역 비중이 61%,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는 46%인데 비해 동아시아권 각국의 전체교역량 중 역내 교역량의 비중은 33%에 불과한 만큼 지역내 경제협력이 증진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게 제안의 배경.
그 결과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동아시아스터디그룹(EASG)’이 설치됐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일부 아세안 국가들은 한중일 3국에 압도돼 아세안의 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한국의 제안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EAFTA 창립의 전 단계로 한중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에게 3국 경제장관회의 개최를 제안, 동의를 얻었다. 이 회의는 올해부터 매년 통상과 재무 두 분야로 나눠서 열려 한중일 경제협력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中 느긋…“아세안과 이미 자유무역 합의”▼
중국은 ‘동아시아의 공동번영을 바랄 뿐 지역 내 경제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공식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제성장에 기반한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브루나이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ASEAN+중국 자유무역지대(FTA)’ 창설에 합의한 것이 한 예다.
동남아는 일본이 선점한 시장. 일본 경제로서는 뒷마당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이들 ASEAN 10개국과 자유무역지대 창설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
중국은 경제 성장과 더불어 새로운 상품시장과 투자거점을 찾아왔다. 동남아 역시 중국과 협력하면 중국의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2000년 ASEAN+3 정상회의에서 처음 제안한 ‘10+1(ASEAN+중국) FTA 구상’이 제안 1년 만에 빠르게 합의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중국은 나아가 한국과 일본도 이 같은 구상에 동참하도록 권유해 왔다.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경제공동체를 이루자는 구상이다. 주 총리는 브루나이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도 일본과 한국의 동참을 권유했다.
일본이 국내산업 보호를 이유로 이에 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견제구를 던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은 자유무역지대가 창설될 경우 중국의 값싼 제품과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올 것을 무엇보다 우려하고 있다.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일본 경제산업상이 지난해 11월 “일본은, 한국은 물론 ASEAN과 하루빨리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협의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중국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베이징〓이종환특파원 ljhzi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