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축’ 발언에 반발〓지난달 31일 러시아 하원의 안드레이 니콜라예프 국방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이라고 몰아붙인 북한 등 3개국은 러시아의 이익에 중요한 국가들이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들 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관점은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지 국제사회의 관점이 아니다”고 비난했다.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특정국의 지배체제에 근거한 국제 관계에는 희망이 없다”며 힘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독주체제를 직접 겨냥했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미-러 관계의 악화를 막기 위해 국내의 비판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해왔다.
▽전략무기 감축협상 이견〓러시아와 미국은 특히 전략무기 감축을 둘러싸고 심한 이견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공격용 핵탄두 감축 합의를 구속력이 있게 문서화하고 감축할 핵탄두를 완전히 폐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구체적인 감축 내용은 구두로 정해도 충분하며 핵탄두를 해체 후 보관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대규모 핵탄두를 유지할 여력이 없는 러시아는 전략무기감축에 대해 적극적인 반면 미국은 전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축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어 러시아의 불만을 사고 있다. 러시아는 현행 6000기의 탄두를 1500기까지 줄이자며 1700∼2000기 수준을 제시하는 미국에 비해 더 적극적이다.
미국은 지난해 5월 미사일방어(MD)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해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와 협상을 벌였으나 끝내 지난해 12월 일방적으로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러시아는 전략무기감축협상에서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미국에 너무 양보”〓푸틴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영공을 개방했고 구 소련권인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등에 미군의 장기적인 주둔을 허용했다.
이에 대해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등 야당 지도자들은 “푸틴 대통령이 미국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쿠바의 러시아군 기지를 철수하기로 결정해 군부의 반발까지 샀다.
푸틴 대통령은 지금까지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 노선에 바탕을 두고 미국의 경제지원 등을 기대하며 미국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독주가 계속되고 이에 대한 러시아 내의 비난 여론이 거세질 경우 양국 관계는 부시 정부 출범 초기의 경색된 관계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