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 날개없는 추락<4>]끝 모를 디플레이션

  • 입력 2002년 2월 27일 18시 00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일(17∼19일)을 앞두고 있었던 이달 중순 무렵 일본 총리 관저가 있는 도쿄(東京)도 소재 나가타(永田)는 연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제 침체에 대한 미국의 거센 책임 추궁이 예상된 터여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를 비롯한 전 각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숙의 끝에 일본은 이달 말까지 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약속했고 27일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골자는 △부실채권을 조기 처리하고 △위기 발생시 공적자금을 투입하며 △일본은행에 금융 완화를 요청함으로써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으로 인한 경기침체)을 막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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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부 내에서도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다”며 한계를 인정했다. 일본은행과 여당인 자민당은 디플레이션이 최대 숙제라는 점에는 인식을 같이하면서도 정부 대책에는 이견을 보였다.

닛케이주가는 지난달 18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 뒤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다. 여기에 엔화 가치와 국채 가격까지 동시에 떨어져 이른바 ‘트리플 약세’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경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온갖 처방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이 잡힐 조짐이 전혀 안 보인다는 점. 물가의 연속 하락은 이미 8년째로 접어들었다.

도쿄 도심의 상점마다 걸려 있는 ‘반액 할인’ 광고는 더 이상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음식점 옷가게 슈퍼마켓 등이 ‘이렇게 싼데도 안 살래?’라는 식으로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럴수록 소비자들은 지갑 끈을 더욱 강하게 조여 맬 뿐이다. 살인적인 고물가에 시달려온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물가하락을 반가워했다. 값싼 제품이 새로 선보일 때마다 장사진을 이루며 경쟁적으로 물건을 사들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할인점 앞의 긴 행렬도 사라졌다. 좀더 버티면 더 싼 물건이 나온다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웬만한 사치품은 이미 모두 갖고 있어 더 이상 사고 싶은 물건도 없다.

디플레이션의 후유증은 요즘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판매부진으로 수익이 악화된 기업들이 임금을 삭감하고 인원을 정리해 실업자가 급증했다. 근로자 가구의 가처분 소득은 98년부터 4년 연속 감소세로 돌아섰고 실업률은 5.6%로 전후 최고수준을 경신했다. 이는 또다시 소비위축으로 이어져 경기침체에 따른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국부(國富) 감소도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재정성에 따르면 국내외 토지나 건물 등 일본인의 총보유 자산은 2000년 말 2973조엔으로 10년 전보다 20%가량 줄었다. 특히 토지 자산액은 1990년 말의 2455조엔보다 40%가량 감소한 1534조엔으로 떨어졌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소비를 늘려 물가를 끌어올리려고 무진 애를 써 왔다. 98년에는 비과세 노인 등 350만명에게 2만엔씩, 총 7000억엔어치의 상품권을 무상으로 지급하면서 소비를 호소했다. 지난해 말부터는 엔저 정책으로 수입품 가격을 끌어올림으로써 국내 물가 인상을 유도했다. 그러나 한번 떨어진 물가는 올라갈 기미조차 없다.

안세일(安世一) 한국은행 도쿄사무소 부소장은 “일반적인 경제원리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이 일본경제의 현실”이라며 “더욱 근본적이고도 파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低價의류 선풍 유니클로社도 마이너스 성장▼

일본이 장기 불황에 빠져들자 한때 저가 제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의류업체 유니클로는 중국 현지 생산을 통해 값싸면서도 품질 좋은 티셔츠 등을 공급해 업계에서 급부상했다. 그러나 디플레이션 시대의 대표적 승자로 꼽혔던 유니클로도 최근 끝없는 소비침체 속에서 성장을 멈췄다.

유니클로는 지난해 8월 매출액이 감소세로 돌아서기 시작해 지난달에는 1년 전보다 35.2%나 줄었다. 8월 말 결산을 앞두고 지난해 10월 예상치보다 매출액은 18.8%, 경상이익은 33.3% 감소로 목표치를 하향 수정했다. 94년 상장 이후 첫 마이너스 성장이다.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사장은 “소비자가 놀랄 만큼 신선한 상품 개발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나 주범이 디플레이션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유니클로는 9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3650만장의 티셔츠를 팔았다. 단순 계산하면 일본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회사의 티셔츠를 입은 셈이다.

비결은 역시 가격이었다. 한 벌에 980∼1980엔(약 9800∼1만9800원)으로 일반 티셔츠 값의 절반이 안 되지만 세련되고 다양한 색상에 품질까지 좋아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다른 대형 유통업체들이 비슷한 제품을 더 값싸게 내놓았다. 함께 값을 낮추자니 채산이 맞지 않았고 새 디자인을 개발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소비자들의 발길은 곧 끊어졌다.

유니클로는 신상품 비율을 10∼20%에서 20∼30%로 높여 유행에 민감한 소비자를 다시 끌어들이고, 아동복 신발 식품 분야로 사업을 넓혀 부진을 만회할 계획이지만 ‘성공 신화’의 재현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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