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에 몰린 일본의 기업과 정부, 학교가 ‘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 연합’으로 뭉치고 있다. 기업간 경쟁만으로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에 산(産)-관(官)-학(學)이 일장기 아래 하나가 되고 있는 것. 과거 일본 기업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할 때 서로 도와주던 전통적 협동방식과 비슷하지만 그 결의와 폭은 더 강하고 크다.
▽반도체 5사 연합〓NEC 후지쓰 히타치제작소 미쓰비시전기 도시바 등 5개사는 차세대 반도체 기반기술을 공동개발하기 위해 6월 공동출자회사를 설립한다. 경제산업성 산하 산업기술종합연구소도 연구설비 매입을 위해 315억엔을 투입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일본 내 대표적 반도체사들이 공동개발에 합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 1980년대 세계 반도체업계 선두를 달리던 일본 기업들은 90년대 들어 한국 대만에 밀리기 시작했다. 각 업체가 독자기술 개발경쟁을 벌인 결과 규격이 서로 달라 효율성도 크게 떨어졌다.
이번 연합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 새로 설립되는 회사는 차세대 첨단기술인 반도체 미세가공 분야에서 공동연구를 추진하며 각 업체는 통일된 규격과 기술을 응용해 로봇이나 게임기, 자동차 등의 핵심 정보기술(IT)기기를 개발할 계획이다.
▽차세대 통신위성망 공동개발〓도요타자동차 NTT도코모 히타치제작소 도쿄전력과 일본우주개발사업단 등 20여개 기업과 단체는 1월 말 위성비즈니스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8자형으로 지구를 도는 이동위성 3개를 쏘아 올려 일본 중국 한국 동남아 등 아태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차세대통신위성망을 공동 개발한다. 이 연구회는 올 상반기 중 사업계획을 마무리짓고 정부에 포럼 설치를 요구키로 하는 등 민관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통신위성 분야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크게 뒤진 상태. 뒤늦게 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각 업체가 손잡고 무려 1000억엔의 사업비를 쏟아 부을 계획이다. 실용화 시기는 5년 안팎. 개발에 성공하면 위성이 3교대로 돌기 때문에 아태지역에 전파가 골고루 전달되며 측정오차도 지구위치측정시스템(GPS)의 10분의 1로 줄어든다.
▽액정개발 산관학 협동〓액정분야도 과거에는 일본이 선발주자였으나 2000년 이후 한국 업체에 밀리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이에 따라 경제산업성 주도로 샤프 세이코엡슨 대일본스크린제조 도쿄일렉트론 등 액정관련 업체들이 공동연구회사 설립을 추진 중이다. 정부가 150억엔의 건립비를 지원하고 도호쿠(東北)대 교수진이 공동연구에 참가하는 산관학 협동방식이다. 도호쿠대가 연구 중인 액정 기초기술을 토대로 2005년까지 30인치 20만엔대의 액정제품을 개발해 한국업체 등에 반격을 가할 생각이다. 경제산업성은 경쟁력 있는 상위업체만 선별적으로 참가시키고 특허나 핵심기술 관리는 일원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