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감상적 반미주의

  • 입력 2002년 3월 25일 18시 36분


어떤 정치 모임에서 이름난 보수 정치인이 김동성 선수의 쇼트트랙 경기 이후 확산되는 반미 분위기를 걱정하며 “금메달이 그렇게 중요한가. 한미 동맹관계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빼앗기고서도 혈맹과의 우의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논리나 미국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위험하게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젊은 선수가 4년 동안 땀 흘린 성과를 엉터리 오심에 의해 빼앗겼다면 온 국민이 분노하고 남을 일이다.

나흘 전 경기에서 부상한 몸으로 출전해 우승을 거머쥔 19세 안톤 오노 선수는 미국에서는 일약 영웅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금메달을 훔쳐간 교활한 사기꾼이 돼버렸다. 과연 오노 선수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사기를 쳤는가? 아니면 김 선수가 크로스 트랙(진로 방해)을 했는가?

▼지나친 애국심 판단력 흐릴수도▼

동계올림픽이 열린 미국 솔트레이크에 다녀온 국내 체육계 인사들에 따르면 경기를 지켜보고 비디오 테이프를 검증한 빙상경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렸다. 한국인 빙상 전문가 가운데도 오심이 아니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도처럼 몰아치는 애국적 열풍 앞에서 맞아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

의견은 자유롭지만 사실은 신성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김 선수가 진짜 금메달의 주인이라고 믿고 싶지만 애국심이라는 열정은 사실 판단의 눈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김 선수를 실격시킨 심판은 호주인이다. 그렇다면 반미가 아니라 반호(反濠)를 해야 사리에 맞다. 그러나 한국인의 믿음과 반대로 호주인 심판의 판정이 옳았다면 우리는 솔트레이크에서 탄생한 미국의 빙상 영웅을 잘못된 사실 인식을 근거로 무자비하게 유린한 것이 된다.

김 선수 사건 이후 인터넷 사이트에서 반미 사이트가 100여 개 이상 생겼다. 부시를 때려주고 욕하는 동영상을 보며 낄낄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는 반미의 노래들은 미국이 금메달을 빼앗아간 것으로 단정하고 미국을 ‘도둑’ ‘강도’ 등으로 매도한다. 쇼트트랙 오심을 인정하더라도 곧바로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을 훼방하는 ‘양키’를 축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끌어가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가는 것이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기후협약 탈퇴, 전술핵 사용검토, 철강에 대한 긴급수입제한 조치 등 일방주의적 정책으로 전 세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과거에 반미는 곧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며 국가보안법에 걸어 잡아가기도 했지만 어두운 시대의 잘못된 법 적용이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철강에 30%의 고율 관세 장벽을 쌓는 것은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해치고 미국 전체 국민의 이익에도 반한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국제적인 협조를 받아야 할 미국이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이 보복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우리의 수출이 미국 시장에 목을 매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동차 수출입현황을 보면 미국이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이 참으로 고맙다. 한국은 작년에 미국에 국산 자동차를 58만3608대 수출해 미국시장 점유율이 3.6%에 이른다. 작년에 한국에 수입된 미제차는 고작 2283대로 국내 시장 점유율이 0.1%에 못 미친다. 미국의 관세 장벽보다도 한국의 비관세 장벽이 더 지독하다.

미국산 자동차는 철강 긴급수입제한조치에 의해 값이 크게 오른 철강으로 제작돼야 하기 때문에 원가 부담이 커져 미국 시장에서 한국산 자동차의 점유율은 당분간 더 높아질 전망이다. 결국 철강에 대한 보복을 자동차가 해주게 된다. 이렇게 한미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얽혀 있다.

▼用美로 실리 추구를▼

단종될 F15K기를 사라는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는 누구나 화가 난다. 프랑스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붙여 값을 깎아야 하겠지만 국방을 상당 부분 미국에 의존하는지라 아무래도 미국 비행기를 사주는 방향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국의 대미 정책은 이런 한계 속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을 비판하는 것도 좋고 잃어버린 금메달에 대한 분풀이를 할 수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과 현실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 친미 대신에 용미(用美)라는 말도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의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해 실리를 추구하는 것은 사대주의도 아니고 패배주의도 아니다. 현실에 눈감은 감상적(感傷的) 반미는 시대착오의 국수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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