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정상회담에서 아랍권의 첫 중동평화안이 채택된 지 하루만인 29일 이스라엘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적’으로 규정하고 요르단강 서안에 진격, 라말라의 아라파트 수반 집무실을 탱크로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을 공격, 유혈사태가 재현됐다.
이스라엘은 27, 28일 팔레스타인측의 자살폭탄 공격 등으로 29명의 이스라엘인이 숨지자 철야 비상각의를 열어 이 같은 초강경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팔레스타인 과격파도 추가 자살폭탄테러로 대응했다. 이로써 아랍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아랍 평화 발의’는 하루만에 힘을 잃게 됐다.
▽아라파트는 ‘적’〓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29일 철야 비상각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라파트는 적이다. 그는 철저히 고립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날 새벽 이스라엘군 탱크 20대가 아라파트 수반의 집무실을 포위하고 출입구 3곳을 모두 봉쇄한 뒤 포격을 시작, 팔레스타인 보안군 한 명이 죽고 25명이 부상했다. 또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곳곳에서 충돌이 빚어져 팔레스타인인 4명과 이스라엘 병사 1명이 숨졌다.
집무실 지하에서 결사항전 태세를 보이고 있는 아라파트 수반은 알 자지라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순교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스라엘측은 테러 기반시설 파괴와 아라파트 수반의 고립을 위해 진격했으며 아라파트 수반을 살해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한편 예루살렘의 한 쇼핑센터에서는 이날 오후 16세의 팔레스타인 소녀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 이 소녀를 포함해 최소한 2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쳤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강공 배경과 빛바랜 평화안〓샤론 정부는 최근 연이은 테러사태를 아라파트가 배후 조종하고 있다면서 그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드러내 왔다.
아라파트 수반은 28일 “미국 중재로 휴전에 합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샤론 정부는 “아라파트가 휴전용의를 밝힌 게 이번까지 10번째”라면서 “필요한 것은 말보다는 행동”이라고 되받았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강공으로 치닫는 이면에는 새 평화안 논의과정에서 드러난 아랍권의 분열상을 감안할 때 지금이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 팔레스타인 내 과격세력을 근절할 적기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난민 귀환권 보장 △동예루살렘 반환 등 이스라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새 평화안에 쏠린 관심을 돌릴 필요도 있다는 것.
외신은 “이번 공격으로 사우디 평화안은 당분간 힘을 잃게 됐다”면서 “새 평화안이 다시 힘을 얻게 될지 여부는 다음달로 예정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사우디 왕세제의 회동에 달려 있다”고 관측했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