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창간 82주년을 맞아 21세기평화재단(이사장 권오기·權五琦 전 통일부총리)과 함께 급변하는 안보환경 속에서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평화포럼’을 개최했다. 3월 26일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에서 진행된 포럼에는 21세기평화재단 이사인 김경원(金瓊元) 사회과학원 원장과 서울대 하영선(河英善·외교학과) 교수가 참석해 대담을 가졌다.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평화연구소’(설립자 김병관·金炳琯 전 동아일보명예회장)는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지만 평화공존이 우선’이라는 취지 아래 학술 문화사업과 민간교류 등을 통해 한반도의 화합과 번영을 촉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0년 4월 창립된 공익재단이다.》
▽하영선 교수〓냉전질서가 해체된 후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10여년째 진행되는 가운데 9·11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쟁과 평화라는 관점에서 21세기 국제질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미국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지금 짜여지는 세계질서가 어떤 모습이 될 것으로 보십니까.
▽김경원 원장〓냉전종식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유형이 단일세력의 패권을 전제로 하는 단극체제(unipolar system)가 될 것이냐, 다수의 강대국이 작용하는 다극체제(multipolar system)가 될 것이냐 하는 현학적이고 학술적인 토의가 지난 10년간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국제질서에 대한 토론은 실제적이고도 절박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현실적으로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정비례하지 않고, 미국의 리더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세력이 사방에 깔려 있기 때문에 국제질서도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 교수〓냉전해체 이후 혼미함이 있었지만 최근 반테러전쟁 속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짜여지는 듯합니다. 9·11테러가 중요한 전기라고 본다면,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미국이 작년 말부터 2단계 대테러전쟁으로 세계질서를 짜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정부가 규정하는 2단계 전쟁의 핵심은 테러조직이 WMD를 사용할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하느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올해 1월 ‘악의 축’ 발언에 이어 3월 초 핵태세검토(NPR) 보고서를 둘러싼 논의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김 원장〓부시 대통령이 집권 후 북한에 강경발언을 해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고 봅니다.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인 2000년 가을부터 이미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를 사실상 중단시켰습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반테러전쟁의 일환으로 WMD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전략적 관점을 가지면서, 북한이 그 타깃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무기체제 전략과 미국의 반테러 전략이 충돌한 것이죠. 미국은 북한이 일정한 선을 넘으면 핵 보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의심을 북한 정책결정자가 갖게하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 교수〓우리에겐 이 문제에 대비할 수 있는 세 번의 단계가 있었습니다.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와 부시팀의 대북정책 입장이 발표된 작년 6월, 그리고 9·11테러 발생 이후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9·11테러 이후 반테러의 시각에서 이분법적으로 세계를 보려는 부시팀의 의중을 못 읽었고, 2단계 테러전에 대해서도 긴박성을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NPR 문제도 94년의 NPR와 비교해 본다면 충격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악의 축 발언도 2차 대테러전이 공식화할 때 예견된 사태였습니다.
▽김 원장〓악의 축으로 거명된 북한 이라크 이란은 모두 반테러 질서에서 볼 때 무기체계상 문제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반도정세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 교수〓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등의 정치적 용어들이 활발하게 사용됐지만 지금은 정부 당국자의 입을 통해 ‘2003년 위기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2단계 대테러전에서 북한이 어떻게 평가되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국제적 상황에서 볼 때 현 시점은 2000년 ‘평화의 해’에서 2003년 ‘전쟁위기의 해’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지금 국제적 요인은 분명히 한반도 상황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남북간의 변수가 한반도 상황에 어떤 작용을 할지 따져보기 위해서는 4월3일 대통령 특사의 방북이 한반도 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짚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원장〓WMD에 대한 북한의 욕구 또는 계획을 어떻게 하면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대북 특사로 가는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에게 주어진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문제의 본질이 북한의 무기체계가 아니라 북한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미국이 지속하는 데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북한에 있다고 봅니다. 북한으로 하여금 그런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게 우리의 당면 과제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요. 북한으로선 핵무기나 생화학무기 등이 생존을 보장할 마지막 카드라고 믿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표현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북한의 생존을 지지(support)한다는 구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햇볕정책의 논리가 완전히 고갈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햇볕정책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사고방식은 문제입니다.
▽하 교수〓미국의 반테러 전쟁이라는 축과 북한의 반외세 투쟁이라는 축 사이에서 임 특사가 어떤 입장을 설정해 북한을 설득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김 원장〓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반도 통일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시급한 것은 평화와 안전이라는 데 합의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각자 돌아가서는 ‘통일을 앞당겼다’는 얘기를 자꾸 해서 오도된 인상을 만들어 놓았고, 그 결과로 정상회담의 다음 단계가 힘들어졌습니다. 이제는 차분하게 원점으로 돌아가 평화공존 체제를 정착시키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하 교수〓특사 파견의 첫째 이유로 우리는 긴장조성 예방을, 북한은 ‘민족 앞에 닥쳐온 엄중한 태세’를 들었습니다. 9·11테러 이후 북한은 생존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 사태추이를 더 예의 주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단계 반테러전 차원에서 보면 북한은 미국의 주적 개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에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할 때 과연 우리가 미국의 대테러전쟁 성격을 얼마나 절실히 읽고 있느냐는 데 의문이 있습니다.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대테러전쟁과 대량살상을 하나의 범주로 묶었는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동맹강화와 대테러 협조, 대량살상무기, 한반도 평화 등으로 나눴습니다. 특사파견의 두번째 이유는 6·15공동선언 준수인데, 북한 발표에는 이 항목이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인 남북합의사항 이행문제는 일정한 진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는데 대선을 앞둔 우리의 대내적 상황을 고려할 때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결국 이번 대북 특사는 굉장히 어려운 짐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김 원장〓실제 북한의 행태는 대외의존적입니다. 식량도 원조에 의존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우리와의 접촉 재개도 경제적 인센티브가 상당히 작용한 듯합니다.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하면 더 공고화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통일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현단계의 목표이지만 북한이 이 문제를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 교수〓장기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마련한다고 할 경우 무엇을 핵심적으로 따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2005년 핵사찰, 그리고 미사일, 재래식무기 등의 분야에서 일정한 진전이 이뤄지면 한반도 평화의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북한으로서는 북한 나름의 평화보장 체제 마련이 중요합니다. 북-미 평화협정, 남북간 불가침선언, 주한미군 철수, 남북의 군감축 등이 그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을 전환시키는 열쇠는 우리의 국내 변수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북한의 변화를 위해 접촉을 시작해야 하는데, 북한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은 채 일단은 접촉부터 해야 하는 악순환의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당근을 쓰되 채찍을 선택지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없을 경우에는 ‘선의의 무관심’을 포함한 형태의 포용정책으로의 전환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김 원장〓북한 사회의 변화 유인이라는 대북정책의 목표 설정은 미국도 우리와 같다고 봅니다. 다만 미국은 북한 사회의 변화를 통한 체제 변화에 정권교체까지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북한이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군사적 공격도 생각하는 것 같다는 점을 북한이 깨닫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하 교수〓임 특사가 4월 초에 북한에 간다 해도 국제여건과 쌍방의 국내여건으로 볼 때 남북관계를 밝게 보긴 어렵습니다. 결국 한반도의 평화구축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 국내체제적인 측면이나 남북 요소, 또 국제변수를 얼마나 잘 읽고 대안을 모색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고 봅니다.
정리〓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1936년생
△미국 윌리엄스대 졸업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박사
△고려대 정경대 교수
△대통령비서실장
△주 유엔·미국 대사
△현 사회과학원 원장
△1947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스톡홀름 국제평화
연구소 초청연구원
△현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현 통일부
통일정책평가회의 위원
△현 한국평화학회 회장